My Mindful Diary

메일함으로 안전하게 보내드립니다. 과정 중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는 jiun@ wal.a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뉴스레터 발송을 위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이용합니다. 수집된 정보는 발송 외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서비스가 종료되거나 구독을 해지할 경우 즉시 파기됩니다.

광고성 정보 수신

제휴 콘텐츠, 프로모션, 이벤트 정보 등의 광고성 정보를 수신합니다.

선재의 일기 Jiun Kim 선재의 일기 Jiun Kim

슬픔에 좋은

똠얌꿍은 슬픔에 좋다. 시큼새큼한 맛과 강한 향은 어지러운 마음을 잡아준다.

엄마와 눈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도 슬픔에 좋다. 엄마와의 순간은, 오랜만에 해외로 짧은 휴가를 떠난 직장인이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걸 진심을 다해 아쉬워하는 것과 같이 소중하고 애틋하다. 슬픈 마음도 엄마와 진심으로 나누고 나면, 무거운 감정은 아래로 가라앉고 따뜻한 다짐과 위로가 가만히 차오른다. 그러면 숨이 좀 쉬어진다. 나는 어쩌면 나보다도 엄마를 더 걱정해서, 평생 엄마를 걱정하느라, 걱정하면서 살 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더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어쩔 때는 내가 무너지지 않고 살 수 있다. 엄마를 평생 걱정하느라 나는 바쁘고, 열심히 산다. 그냥 대부분의 시간에 엄마를 걱정하면서 산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상담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 엄마는 나보다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강한 사람인데도 그렇다. 엄마 걱정은 그냥 나의 습관이고, 내가 거친 삶에 맞서는 무기이고, 방어기제다.

엄마가 인생 최고의 만찬에 대해 이야기 해주었다. 어느 날엔가 집에 돌아왔더니 아빠가 온 주방을 엉망으로 만든 채 배시시 웃으며 가리키던, 바삭히 튀겨낸 조기라고 했다. 엄마가 말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을 기억을 공유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라져 버리기에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니까. 그렇게 영영 내가 듣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이야기가 혹시 또 있을까, 나는 가끔씩 조바심이 묻은 여러 질문들을 엄마에게 습관처럼 건넨다. 

아빠가 살아 있을 때가 스마트폰이 없었던 시절이라는 건 놀랍다.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아빠는 정말 신나 했겠지. 온갖 최신 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코인이 있는 세상을 아빠가 맛보지 않고 떠난 것은 다행일 지도 몰라. 엄마와 나는 농담도 한다. 그러다 엄마가 말한다. 떠난 사람 이야기는 안 하고 사는 집도 있다던데. 나는 이렇게 너랑 아빠 얘길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엄마는 평생을 본인이 아빠를 데리고 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빠가 그 넓고 무던한 마음으로 뾰족했던 엄마를 품고 살았던 거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그래서 예민하고 뾰족했던 자신이, 네 아빠를 만나 많이 둥글어졌고, 그렇게 많이 둥글어진 덕분에 지금 이렇게 주위에 좋은 사람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거라고 했다.

아빠가 떠나고 몇 년 간은, 엄마가 살고 싶지 않아 할까봐 겁이 났다. 다행히 이제 그런 걱정은 없다. 엄마의 건강 걱정, 내가 엄마에게 보답하고, 엄마를 원없이 호강시켜줄 기회가 내게 오래 남아있길 바라는, 뭐 그런 조바심이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은퇴를 하고, 언젠가 할머니와 반야도 떠나고, 지금의 것들이 한 차례 모두 흘러가고 나면, 그 애도를 충분히 갖고 남은 삶에선 어떠한 것도 책임질 필요 없이 홀가분한 기분으로 영어 공부도 하고 싶고, 글도 쓰고 싶고, 프랑스 자수도 배우고 싶댔다. 산티아고도 가고 싶고, 통영 동피랑 마을도 가고 싶고, 집도 오직 엄마의 취향대로 꾸미고 살고 싶댔다.

나는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꼭 살게끔 도우려고 한다. 그렇게 돕기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와 돈 중 일부를 적금처럼 아껴두려고도 한다. 엄마에게도 말했다. '엄마, 나는 아이 안 낳고 살기로 했거든. 일 년에 두 번씩 여행 다니고, 새로운 것도 계속 배우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기로 했어. 우리가 아이 낳지 않아서 아끼는 돈과 에너지, 시간은 가족들에게 더 쓰기로 했어. 그러니까 걱정 마. 건강만 해. 남은 생은 점점 더 편하고 점점 더 좋아지게만 해줄게.' 어렸을 땐 집도 사주고 차도 사준댔지만 아직 그건 못했다. 머리가 좀 크고 나선 이런 약속을 할 여유가, 준비가, 자신이 없지만 이제는 마음의 여유가 분명히 있고, 자신 있는 것까진 아니어도 각오는 되어 있다. 그래서 엄마에게도 미리 말해준다. 너무 오래 아껴두지 않고. (오래 아껴두는 것은 똥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떤 마음이 살아 있다거나, 눈빛과 감정, 감각 같은 것들이 생생히 살아 있을 때,

소중한 사람이 바로 옆에 살아서 함께 하고 있을 때,

그런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마음을 전하고, 질문하고, 들으며 살려고 한다. 

이걸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다. 당연한 줄 알고 누렸던 존재가 주는 든든함과 행복이 내게 공백이 된 것을 목격할 때 슬퍼지는 순간이 가끔은 여전히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일을 지나오며 누군가의 아픔과 상처를 보는 눈, 진심으로 같이 공감하고 울어줄 수 있는 마음, 현재 이 순간에 더없이 감사할 수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하다.

이렇게 나의 현재에 감사하다 보면, 슬픔도 조심히 자리를 비켜주듯 물러간다.

📌  파오리
약수역 도로 앞에 우아하고 소담하게 위치해있는 작은 카페. 탁 트인 통창 앞에 앉아 약수동의 느긋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도 덩달아 부풀어난다. 사장님이 논커피에 대한 갈증에서 시작하신 카페라고 하는데, 아이스 커피 맛도 훌륭하다. 아침에 가도 좋아요.

쓴 사람 | 이선재

 
Read More
영은의 일기 Jiun Kim 영은의 일기 Jiun Kim

질문을 품는 시간

2019년 5월, 12일간 침묵 안거 수련에 참여했었다. 새벽 4시부터 저녁 9시까지 스케줄에 따라 길고 짧은 명상 수련을 반복하며 틈틈이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 참가자들은 80명 정도 되는데,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가능한 한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단체 명상 홀 외에는 1인 1실에 머문다. 핸드폰은 제출해야 하고 읽을거리나 쓸 거리도 가져갈 수 없다. 철저히 자기 자신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루에 딱 한 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 8시 30분부터 9시 사이 수련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날마다 10시간씩 수련을 했기 때문에 궁금한 것이 정말 많았다. 30~40명의 참가자가 저마다의 질문을 하기 위해 한 줄로 서서 대기를 했다. 전체 질문 시간은 30분 정도였기 때문에 각자 1분 남짓의 시간이 주어지는 셈이었다. 나는 10가지 질문을 5가지로, 3가지로, 그리고 정말 어렵게 1가지로 줄였다. 단 하나의 질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정말로 궁금한 게 이거 맞나?’ 여러 번 반문했다. 처음에는 앞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해서 미리 답을 듣기도 했다. 과정이 절반 이상 지나면서 추려낸 질문들은 수련 기술 자체 보다 나의 수련 경험에 기반한 것들이 많았다. 질문은 언제나 하나만 했고 역시 하나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궁금한 점이 말끔히 해결된 날도 있었지만, 더 헷갈린 적도 있었다. 그런 날은 여전히 불완전한 느낌 속에서 다음 수련에 임해야 했다. 

2024년 1월, 왈이네에서 8주간 불안 완화를 위한 명상 코스를 지도했다. 이 코스에서는 이미 여덟 번째 기수를 맞이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코스가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질문할 수 있는 시간은 수업의 절반 이상으로 나름 넉넉하게 마련해두었는데, 첫 몇 번 회기의 수업이 30~40분 이상 시간이 초과되어 끝났다. 질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든 질문이 반갑고 때로는 매우 중요한 질문들도 있어서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감고 수련해야 할 시간을 쓰지 못할 만큼 여러 질문이 쏟아진 날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대답을 잠시 멈추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했다. 질문을 하기 전에 잠시 질문을 품어보자고.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불안해서 묻는 건지를 구분해 보고 정말로 궁금한 질문 한 가지만 해보자고. 열띤 토론을 이어가던 중 생경한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다시 질문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진 후 ”아차차! 사실 중요한 질문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고 다른 질문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업 중에 여러 질문이 있었지만, 그 전과는 다르게 의미 있는 질문들이 많이 나왔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깊이 생각한 후에 내놓은 질문을 통해 예상치 못한 것을 배우기도 했다. 

최근에 대학원의 연구실에서 행정 보조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언론사에서 잠깐 일해봤던 경험과 창업 경험밖에 없던 나는, 대학원의 행정 시스템이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문서로 된 가이드라인이 거의 없어서 사소한 질문도 동료에게 계속 물어봐야 했고, 바쁜 교수님께도 계속 직접 질문을 하게 됐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점점 많아지고 기한도 촉박해지면서 내 질문 속에는 나도 모르게 답답함이 섞이기도 했다. 바쁜 업무가 한 차례 지나간 후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번 업무에 대해 몇 가지 질문과 제안 사항을 준비해 갔다. 지시하신 업무 목적이 불분명해서 업무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업무 목적이 분명해야 지금 취하는 전략이 적절한지 파악할 수 있고 목적에 맞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업무를 지시하실 때 목적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교수님께서는 내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그렇다면서 “(목적을 말하지 않아도)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대답했다. 또 내가 진취적인 면이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다소 어그레시브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나는 준비해 온 다음 질문을 꺼낼 수 없었다. 이후 나는 ‘강제로’ 업무 관련 질문들을 품게 되었다. 질문이 생겼을 때는 복잡하게 섞여 있는 모든 폴더를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필요한 정보를 찾았다. 그래도 못 찾을 때는 급하지 않은 경우라면 며칠씩 더 기다렸다. 그렇게 업무 메신저에 무수히 올린 물음표들이 점차 잦아들었고, 사실 질문을 안 해도 괜찮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남겨두는 상황도 괜찮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면 모르면 안 되는 상황도 있었는데 그럴 때만 질문을 했다. 평상시에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려고 애썼다. 

‘질문하라. 멍청한 질문은 없다. 멍청한 질문이 세상을 바꾼다.’ 이런 구호들은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문화권의 사람들을 독려하고자 쓴 구호 아닐까. 정말 ‘멍청한 질문’은 없는 걸까? 그동안 답을 빨리 찾고 싶어서 했던 질문은 다소 멍청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몇 마디 대답을 들으며 불안을 일시적으로 잠재우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 그 질문은 마치 해결된 것처럼 보였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인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을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만 있는 책이다. 인도에서 저마다의 답을 찾아왔다는 글이나 책을 많이 접했던 터라 나도 그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내심 기대했었다. 그 책을 덮으면서 다른 다짐을 했다. 답을 찾는 대신 좋은 질문을 찾아보겠다고. 그게 벌써 수년 전인데 나는 아직도 질문 속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좋은 질문’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당연히 답도 찾지 못했다. 몇 달 혹은 몇 년씩 한 가지 질문 속에 살기도 했다. 잘 모르는 느낌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지치고 힘들었다. 하지만 분명히 좋았던 순간도 있었다. 질문을 푸는 것을 멈추었을 때 그랬다. 질문을 품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답을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고 질문 속에서 그저 머무르는 몇몇 충분한 순간이 있었다. 그런 날들은 겉으로 봤을 때는 움직임이 없거나 침묵으로 보였던 것 같다. 다행히도 그렇게 오래 품은 질문들은 정말로 더 ‘좋은 질문’을 낳았다. “엄마, 하늘은 왜 파란색이야?”로 시작되었을 나의 질문 역사가 삼십여년을 거쳐왔다. 내일은 또 어떤 질문을 마주하게 될까. 어디 한번 품어보자는 마음으로 맞이해본다. 

 ☀︎ 매뉴팩트 연희

매뉴팩트에 쿠폰이 생겼다. 도장을 8개 모으면 블랙커피 한 잔, 16개면 라떼 한 잔, 24개면 콜드브루 한 병을 준다. 24개를 모으고 콜드브루를 한 번 받았는데 그날 이후로 종종 콜드브루만 산다. 콜드브루로 아메리카노나 라떼를 만들어 마실 때 물이나 우유의 비율을 알려주는 친절한 레시피 카드도 함께 준다. 라떼를 좋아하지만 유당불내증이 있는 나는 ‘소화가 잘되는 우유(유당 0)’를 따로 사서 콜드브루를 섞어 마시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거 매뉴팩트가 실수한 것 같다. 앞으로 커피 사러 갈 일이 줄겠다. 산미가 좋거나 고소함이 풍부하거나 취향대로 고를 수 있을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산미를 좋아한다면 ‘샌프란시스코’가 좋다.

쓴 사람 | 영은

 
Read More
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썰매 타는 어른들

카니발 차에는 다섯 명이 있었다. 애정 하는 동네 책방 사장님 부부와 아이들 셋. 거기에 우리 부부 둘이 더해져 일곱 명이 한 차에 타고 강릉에서 평창으로 향했다. 여행은 한 달 전에 계획되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장님은 우리에게 초등학생 첫째 아들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언제 한 번 눈 쌓인 곳으로 출사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세 명이 더 합류했다. 둘째와 셋째, 그리고 아내분도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그 이유인즉슨 이틀 전부터 눈이 펑펑 내렸기 때문이다. 강릉보다 눈이 더 많이 오는 평창은 또 얼마나 많은 눈이 쌓여있을까. 분명 특별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주말, 아빠와 오빠만 좋은 곳으로 보내기엔 분명 아쉬웠을 테지. 그렇게 모두가 함께 놀다 오기로 했다.

아이들과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종종 사장님과 책방 출근을 함께 하곤 했는데, 사장님이 차로 아이들을 등교시켜주고 출근하다 보니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하며 안면은 튼 상태였다. 만날 때마다 아빠가 ‘안녕하세요 해야지'라고 하면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는 차에 타 있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놀러 가는 날이라 마음이 활짝 열린 걸까.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아기 새들처럼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쫑알 쫑알 대기 바빴다.

제설차 기사님들이 도로의 눈을 부지런히 치워주신 덕분에 곤혹을 치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옆으로 펼쳐진 눈꽃 풍경들이 깔끔하게 치워진 도로와 대비되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멀리에는 눈으로 뒤덮인 하얀 산에 깃발처럼 꽂혀진 풍력발전기가 보였고, 가까이에는 무거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들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들은 고동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에 뒤덮여 있있다. 보통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나무의 한쪽 면만 눈이 쌓이기 마련인데, 이를 보며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이렇게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파묻힌 풍경을 보는 건 아이들이나 우리나 처음이라 ‘우와, 우와!’ 소리 내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평창의 실버벨 교회로 향했다. 언덕 위에 돌로 지어진 소박한 교회인데, 언덕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회색빛 교회와 대비를 이루었다. 주차장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았지만, 교회 내부에는 단 한명 뿐이었다. 그 사람마저 교회를 구경한다기 보다는 난로 곁에서 불을 쬐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냐하면, 교회 밖에서 각자만의 눈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김치통을 가져와서 이글루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각자의 썰매를 가져와서는 언덕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창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은 썰매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것도 무려 다섯 개나! 그때부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썰매를 탈 생각에 가슴이 두근댔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 썰매를 타는 게 오늘의 목적인 사람처럼. 썰매를 타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 일이라, 오랜만에 썰매 탈 생각에 마음이 들떴나 보다. 교회를 목적지로 두고, 출사 여행을 왔으니 교회 내부를 훑어보기야 했지만, 마음은 이미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 사이 사장님과 첫째 아들이 차에서 썰매를 가져왔다.

그곳은 상업 썰매장이 아니라 그저 경사 높은 언덕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곳이 원래 썰매장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사장님에게 썰매를 건네받은 나는 출발점에 섰다. 썰매에 앉아서 아래를 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급해 보였고, 끝에는 나무 덤불이 있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타서인지, 안전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살짝 긴장이 되어 썰매 줄을 꼬옥 잡았다. 그러고는 두 발로 바닥을 밀어 썰매에 몸을 맡기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내려가기 시작하자마자 소리를 냅다 질렀다. 조금 무섭기도 했고 동시에 아주 신나기도 했는데, 시시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릴 있었다. 언덕의 끝자락에는 거친 나무 덤불이 자리해있어서 거기에 푹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속도를 줄여야 했는데, 양발 뒤꿈치로 최대한 브레이크를 밟다 보니 몸과 얼굴에 눈이 한가득 튀었다. 덤불 앞에서 눈을 한껏 뒤집어 쓴 채 겨우 멈춰 서는 ‘하아~’하고 철퍼덕 드러누웠다.

아이들과 누가 더 멀리 가는지, 누가 더 빨리 가는지 시합을 하기도 하고 2인 1조가 되어 앞뒤로 사이좋게 타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찌나 재밌어하던지, 연신 눈을 뒤집어 쓰면서도 깔깔깔 웃었다. 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 아내의 표정을 보며 내 표정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둘째는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밭에 벌러덩 눕더니 소금쟁이처럼 팔다리를 쭉 펴고는 위아래로 휘적거렸다. 나는 여분으로 가져온 옷도 없고, 눈이 몸 안으로 들어갈까 봐 드러눕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눈이 몸에 들어가든 말든, 감기에 걸리든 말든,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벌러덩 누워서는 헤헤 웃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도 없이 최선을 다해 신나고 재밌게 놀았다. 덕분에 그들과 함께 있는 나 역시도 아이처럼 순수하게 놀았다. 누군가 보기에는 어른인 내가 아이들을 잘 놀아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나는 내가 그들의 또래 친구가 된 것처럼 신나게 놀았다.

썰매를 다시 타기 위해 언덕을 오를 때면,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썰매를 타는 어른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썰매를 타서 신이 났는지 깔깔깔 소리 지르며 행복하게 노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고, 덕분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으레 어른의 모습을 떠올리면 얼굴은 피곤해 보이고 몸은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축 처져있는데 반쯤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지르며 썰매를 타는 그 어른들은 누구보다도 해맑고 순수한 어린아이들 같았다.

저녁이 되어 다시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는 ‘오늘 하루 짱 재밌었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 셋 모두 잠에 들었는데, 첫째는 자신의 소중한 카메라를 바닥에 떨어뜨렸는지도 모를 만큼 깊이 잠에 들었다. 갈 때는 모두들 쫑알대기 바빴는데, 모든 체력을 다 쏟아냈는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앞으로도 온 힘을 다해 신나게 놀며 많이 웃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들은 내 이름도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나. 그저 하루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인 것을. 눈싸움 아저씨 정도로 기억되려나.

☀︎ 에스프레소 스퀘어 @espresso_square

커피 맛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에스프레소 스퀘어의 커피가 맛있다는 건 안다. ‘어떻게 커피에서 이런 맛이 나지?!’ 초콜릿 향 풍미가 깊이 느껴지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집 주변에서 이런 원두를 살 수 있다는 걸 행운으로 여기게 된다. 강릉역 인근에 있으니 강릉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려보기를!


쓴 사람 | 현우

 
Read More
하윤의 일기 Jiun Kim 하윤의 일기 Jiun Kim

달뜬 마음

무엇을 좋아하나요, 묻는다면 지금으로선 답은 하나뿐이다. 근 몇 개월 나의 삶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어느 날 아침, 왼쪽으로 볼록한 가느다란 그믐달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달을 언제 어디서 볼 수 있는지를 몰랐다. 달의 모양이 매일 달라지고 뜨고 지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데 27일하고도 7시간 좀 넘게 걸린다는 것도. 태어난 이후 줄곧 달과 함께 했으면서 이토록 모르고 살았다. 왜 아무도 달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속삭여주지 않은 걸까.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달이 보이기라도 하면 그토록 반가울 수가 없었다. 뜨고 지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는 태양과 달리 달은 언제 나타나서 사라지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변덕스럽고 수줍은 달이 점점 더 궁금해져서 온갖 책과 인터넷을 샅샅이 찾아가며 알고 싶은 것들을 알아갔다. 누군가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일 수 있지만 내게는 모든 게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달, 너는 누구니?

  고개를 들어 물은 순간, 달이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돌아가듯이 나의 삶은 달을 중심으로 궤도를 돌기 시작했다. 달을 사모하는 이는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 해가 지고 검푸른 빛이 드리울 즈음 동쪽 바다로 간다.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붉은 보름달이 바다 위로 서서히, 그러나 결코 멈추지 않고 떠오른다. 보름이 되기 한참 전부터 그날의 날씨를 살펴보고 언제 어디서 보름달을 볼 것인지 고민하고 장소를 찾아본다. 이번에는 어떤 보름달을 만나게 될까? 보름이 되기 며칠 전부터 생각이 온통 달빛으로 가득 차 있다. 바다 위로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마음은 도통 가라앉지 못하고 흥분된다.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있는데 바로 ‘달뜨다’이다. 달이 뜨면 ‘달뜬’ 마음이 된다. 이 단어를 만든 옛사람들도 달을 보며 달뜬 마음이 되었던 것일까? 이 글이 발행되는 2월 24일은 2월의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이므로 나는 검푸른 바닷가 어딘가에서 둥근 달을 경건하게 맞이한 순간부터 아침 해가 떠올라 달이 서쪽 너머로 희미하게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고 전송할 것이다.

  달은 나를 물리학으로 이끌었다. 과학에는 영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눈을 반짝이며 물리학 책을 탐독하고 있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표현한 ‘아름다운’ 방정식들을 이해할 수 없어 그 단순한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겐 친절한 물리학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이 방정식이 어떤 의미인지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주기에 나처럼 과학을 모르는 사람도 그 아름다움을 살짝 맛볼 수 있다.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까마득한 옛날부터 세상은 멈추지 않고 움직이며 질서와 무질서를 펼쳐왔다. 선생님들은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를 오가며 인간이 보는 세상과 본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를  속삭여준다.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나의 감각으로는 보지 못하지만 실재하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선생님들조차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그러나 실재하는 무언가가 눈앞에 얼마나 많을지도 생각한다. 과학은 인간의 무지를 깨닫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납작하고 단순하게 세상을 감각하는지 깨닫게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은 나를 무력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선한 바람이 되어 숨통을 트이게 한다. 

  나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기독교 너머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울타리는 가족뿐이었고 안온한 울타리 너머로 나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일요일마다 교회에 갈 때, 여기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이 내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연한 생각과 행동이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헌금을 내는 일이나 친구나 모르는 사람을 전도하는 일 같은 것. 그러나 그런 불편함도 잠시, 일요일은 그저 가족과 함께 정다운 나들이를 다녀오는 날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건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재를 양성하는 하나님의 대학’이라고 소개하는 이곳은 학교보다는 교회에 가까웠다. 생각과 태도, 관계 등 모든 것이 같은 믿음 아래 하나의 정답으로 존재했다.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 전부 나는 알지 못하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며 그의 가르침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어떠한 의심도 갖지 않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공부를 할 때나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나 ‘하나님’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이곳의 생활이 괴이하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의심은 순백의 믿음과 대비되어 매일 매 순간 불순하고 컴컴해졌다. 어쩌면 진짜로 이상한 건 나일지도 몰랐다.

  학교에 입학하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창조와 진화’라는 과목이었다. 세상의 기원과 지금에 이르게 된 과정을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과학을 전공한 교수님들이 매주 차례로 강단에 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과정과 증거들을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문스럽기만 했다. ‘이건 증거가 아니잖아. 단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거잖아. 이런 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교수님들은 진화론에 대해 비난에 가까운 비판을 했고 나는 ‘납득이 안되는 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론인걸…’ 혼잣말하면서도 수업은 성실히 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암기해서는 높은 성적을 받았다. 시험을 마치고 문을 나설 때 ‘그래도 창조론은 아닌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며 걸어 나왔다. 마치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혼잣말 한 것처럼. (사실 이는 전해져내려오는 이야기일 뿐 실제로 갈릴레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후 9년 동안 과학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달에 푹 빠져 과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는 과학이란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을 발견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연구를 바탕으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찾아내고 공유하며 불확실한 가운데 계속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학자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사실들이 단 하나의 발견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고 지식의 가장자리, 그 경계 너머의 세계로 시선을 둔다. 안전한 믿음에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 과학이란 의지할 구석이란 없는 변덕꾸러기일 따름이다. 한편 먼지만큼 작고 하찮은 자신의 존재를 알고, 아무리 알고자 해도 알 수 없는 지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아는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과학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세상의 속살을 보여준다. 

  내가 우주에 대해 한평생 알 수 있는 내용은 개미 발자국보다 작을 것이다. 그 ‘작고 적음’이 지금 무언가를 생각하고 공부하고 감각하는 것을 무상하게 만들지만 그게 허무하지는 않다. 과학은 끊임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라고 말해주지만 나는 그 말이 믿음직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만나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고 그 의미 있는 것이 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돌이켜보면 누군가의 믿음대로 세상을 설명해놓은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암기하고 있을 때, 마음이 공허했고 세상은 흥미롭지 않았다. 나로서는 세상이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던 바와 얼마나 다른지 아무것도 믿지 않고 계속 알아가는 삶이 편안하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실에 가깝다면 그쪽을 선택하고 싶다. 확실하고 충분한 근거가 없다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다는 태도, 믿음이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냉소적인 태도는 어떤 환경에서는 ‘불순하다’고 불리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과학적’이라 불린다. 이제야 나는 나의 시각과 태도를 기꺼이 긍정할 수 있게 된 듯하다.

  5년 후, 나는 누구와 함께 있고,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지 모르고 짝꿍도 내 곁에 있을지 모른다. 언제든 누구든 나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그의 떠남을 기다리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5년 후, 여전히 이 세상에 살아있다면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때에도 나는 달을 보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달은 지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지만 내가 살아있는 시간은 달의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테니 달이 지구를 더 이상 돌지 않는 세상은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아득히 먼 달의 시간과 감쪽같이 사라질 나의 시간을 생각한다. 달을 떠올리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곁에서 영롱히 수줍게 웃는 친구의 따뜻한 손을 잡는 기분이 된다. 달을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다. 단 조금도.

📌 홈카페 with 명주상회 짜이 키트

명주상회 짜이 키트를 구입해서 집에서 진하게 짜이를 끓여마시는 걸 좋아한다. 내 입맛대로 짜이 블렌딩을 넣고 두유를 넣고 당도를 조절할 수 있기에 가장 믿음직스럽다. 명주상회 짜이키트는 향신료 향이 강하고 나는 어떤 음식이든 향이 독특하고 강한 쪽을 선호하기에 무척 만족스럽다. 구입은 명주상회에 직접 연락해서 할 수 있다.

@myungjusanghoe

쓴 사람 | 하윤

 
Read More
유진의 일기 Jiun Kim 유진의 일기 Jiun Kim

평소에 침대에 눕자마자 자거나, 깊게 잠드는 편은 아니었다. 예전에 친구 네 명과 여행을 가서 둘씩 더블베드에 나눠서 잔 적이 있는데, 함께 침대를 사용했던 친구가 자신이 뒤척거릴 때마다 내가 깨서 힘들었다고 했다.

빛 차단을 위해 수면 안대를 끼고,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깨서 귀마개를 낀다. 호기심에 샀던 입벌림 방지 테이프까지 했을 땐… 이렇게까지 하면서 잠을 자야 하는 내가 우스웠다. 숨을 쉬어야 하는 콧구멍을 빼고, 얼굴에 뚫린 곳(눈, 귀, 입)을 다 막는 게 웃겼다.

이런 내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아주 깊게 잠드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작년 6월 사정상 친구네 집에서 잠깐 지낼 때, 꽤 큰 소리가 나도 깨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수면 패턴이 바뀔 수 있지? 신기해서 주변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각자 짐작 가는 이유를 말했다. 그중 가장 공감 가는 이야기를 마침 나와 여행을 같이 갔던 친구가 했다.

“너 제리(반려견)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니야?”

친구는 내가 그동안 제리를 신경 쓰면서 자느라 숙면을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짚었다.

제리가 살아있을 적에는 줄곧 나 혹은 엄마와 함께 침대에서 잤다. 우리는 밤마다 제리를 데려가 함께 자기 위해 티격태격했다. 제리는 가끔 새벽에 깨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 했고, 밥을 더 먹고 싶어 했고, 어떨 땐 토(급하게 먹은 저녁이 체해서)를 했다. 엄마는 잠들면 아무 소리도 못 듣는 편이라 내가 제리의 발자국 소리를 듣자마자 깨서 새벽의 시간을 보살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잠귀가 밝아졌나 보다. 나에겐 돌봐야 할 존재가 있으니까.

제리가 죽기 전까지는 살면서 죽음을 맞이해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큰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수능 직전이어서 가족들이 장례실에 못 가게 했다. 시간이 지난 후, 시험 때문에 친척의 장례식을 못 간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정신없던 그때는 알겠다고 했다.

삶의 끝에 죽음은 당연히 함께 하는 것인데, 경험한 적이 없으니 죽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제리가 18살 노견이라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주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이별은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바빴다. 퇴사하고 이제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았다. 매일 10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하는 스케줄이었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생각에 꽤 들떠있었다. 아침과 밤 시간을 쪼개 제리를 보며,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여 부모님께 병원에 데려가길 부탁했다.

하필 연휴가 껴있고, 가족 모두 바빠서 병원에 가는 게 하루 이틀 미뤄졌다. 그땐 그게 골든타임일 줄 상상도 못했다. 제리는 약 한 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 살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라고 믿고 견디며 시간을 통과했다.

제리는 엄마의 퇴근 시간인 오후 3시, 집에 도착해서 잘 있었냐는 인사를 하자 엄마를 기다렸던 것 마냥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숨을 거둔다’는 문장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그 이후로 오랜 시간 내 숨이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 숨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고 불편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요가를 하던 어느 날, 사바아사나 때 들리는 나의 숨소리에 눈물이 고였다.

이제 일 년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다. 더 이상 사바아사나를 할 때 울진 않는다. 잠을 깊게 푹 자게 되었고, 매일 숨을 의식하게 되었다.

📌 카모플라쥬 커피

뚝섬역에 작업실을 얻은지 1년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알게 된 내 취향과 완벽하게 부합하는 카페. 깔끔한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단정한 음악. 맛있는 커피. 혼자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좋고, 짧은 미팅을 하기에도 좋다.

쓴 사람 | 박유진

 
Read More
선재의 일기 Jiun Kim 선재의 일기 Jiun Kim

신수동 수엠부를 아시나요?

내게 인도/네팔 커리는 특별하다. 누군가 식사 메뉴로 ‘인도 커리’(표기법을 고민하다가 깨달은 건데 막상 유명한 식당은 ‘네팔 음식점'이라고 표기된 곳이 많은 반면, 사람들은 모두 인도 커리라고 부르지 네팔 커리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의 제안을 표현하는 부분이라 인도 커리라고 씀.) 를 권했을 때 한 번도 ‘당기지 않는데' 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히려 더 보편적이거나 안정적일 것 같은 라면이라든지 찌개 혹은 햄버거 같은 것들은 날마다 그 메뉴에 대해 구미가 당기는지 여부가 매우 확실하게 나뉘는 편이라면, 인도/네팔 커리는 희한하게 다른 것들에 대한 상상을 모두 덮어쓰기 하는 힘을 가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만큼, 동대문의 히말라야부터 이태원의 아그라 등, 인도/네팔 요리로 유명한 식당은 제법 가보았지만 지금까지 마음 속 일 등은 ‘수엠부'라는 작은 식당이다. 서강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신수동의 이 작은 네팔 식당은, 나와의 역사가 이제 10년을 넘어가는 곳이며 동시에 많은 이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10여 년 동안 수엠부를 운영하는 사람(혹은 가족)이 수차례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주인이 계속 바뀌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야기를 나누어본 결과 수엠부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주인이, 요리를 하고 전반적인 식당 살림을 할 사람(가족)을 고용하면 그들이 실질적인 식당 운영을 하면서 월급을 받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거나 하며 다음 사람을 구하는 식의 구조였다. 

맨처음에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는 조금 씁쓸했지만, 이내 그 씁쓸함은 ‘그렇다면 그렇게 여러 번 사람들이 바뀌는 동안 너무나 알맞고 적당한 커리의 간이나 난의 굽기, 푸짐함 같은 것들은 어떻게 유지되어 온 걸까?’라는 궁금증으로 바뀌었다. 같은 재료와 양념을 쓰는 엽기떡볶이나 교촌치킨 같은 체인점에서도 지점마다 미묘하게 다른 레시피나 재료의 양, 감칠맛 같은 것들을 캐치해내는 세상에서, 몇 번씩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바뀌는 동안 수엠부가 그냥 기복 없이 수엠부일 수 있는 이유는 뭐였을까. 

이 쓸데없는 궁금증은 여러 가설로 이어졌는데, 그중 하나는 이것이다 : 손님들이, 수엠부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그저 ‘네팔 현지인들’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더 깊은 관찰이나 인식을 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의도치 않은 무심함과 무지한 태도 때문일 지 모른다(!)

이를테면 매일 가던 백반집 사장 할머니가 갑자기 어느 날 안 보이고 서툴러보이는 젊은이가 사장 행세를 하며 부엌을 쏘다니고 있으면, 갑자기 오늘따라 국이 싱겁거나 계란말이가 퍽퍽하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효과가 있지 않은가. 만일 위에서 내가 제시한 가설과 같이 사람들의 무지함 혹은 무심함이 실재한다면, 수엠부의 맛이 사람 따라 조금 바뀌거나 기복이 있다고 해도 ‘주인이 바뀌어서 그래~’ 같은 류의 결론이나 정확한 인지 없이 그냥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구조를 (의도치 않게) 갖추게 된 걸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멀리 간 생각.

물론 이보다는 조금 더 무던하게, 그냥 수엠부에서 내놓는 요리가 대단히 특별한 맛이라기 보다는 요리 솜씨나 손맛이 조금만 있으면 구현할 수 있는 전형적인 요리라는 가설도 있다. (흠, 그렇다면 수엠부의 커리와 난이 왜 서울 대부분의 다른 가게들보다 계속해서 더 맛있고 훌륭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여러 엉뚱하고 이상한 가설들을 지나는 동안 스스로 깨달은 새로운 사실 하나는, 나는 원래 카페든 술집이든 식당이든 어떤 공간을 상상할 때 그 공간을 운영하거나 이끌어가는 사람을 무척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는 편인데, 수엠부에 대해서만은 놀라울 정도로 그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나 인식, 같은 것이 적다는 사실이다. 10여년의 역사를 함께 쌓아왔다, 고 말하면서도 10여 년 동안 수엠부 부엌을 거쳐간 사람들의 얼굴이나 특징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데서 오는 조금의 놀람.

그 놀람은 그리고 자연히 이런 지점들로 연결된다. 수엠부는 엄연히 네팔 음식점이고 나는 수엠부를 가고 싶은 것인데도 자꾸 ‘인도 커리' 먹으러 가자고 한다든지, 치킨 티카 버터 마살라는 사실 영국의 대표 음식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인도 커리의 일종으로 알고 있다든지. 인도 커리가 맞는지 네팔 커리가 맞는지 정확히 분류하여 표기하는 대신 인도/네팔 커리라고 적당히 퉁치려 하는 나의 게으른 태도.

우선 이 글을 마치는 대로 인도 커리와 네팔 커리의 차이점을 검색해봐야 겠다. 그리고 조만간 수엠부에 가서, 앞으로 나와 새로운 수엠부 역사를 함께 할 얼굴들을 다정히 바라보고, 고유함을 발견하려 관찰해보고, 특징으로서 기억해보아야지.

📌  Reperk
무엇이든 빼곡하게 들어서있는 강남대로 한가운데, 흔치 않은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카페. 점심시간에 잠시나마 숨을 돌리고 싶을 때 통유리 옆에 앉아 햇살을 있는 대로 맞으며 에너지를 얻곤 했다. 어쩐지 여름 보다는 가을과 겨울에 더 어울리는 카페. 겨울이 끝나기 전에 가볼 것을 추천!

쓴 사람 | 이선재

 
Read More
지언의 일기 Jiun Kim 지언의 일기 Jiun Kim

청소부

1/5

“이번에 미화원 아저씨 바뀌신 것 같더라.”

“또?”

이 동네에 살게 된 이래로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세 번 바뀌었다. 한 아저씨가 황급하게 수풀로 뛰어가는 장면을 보았고, 그가 지퍼를 잠그며 나올 때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근처에 공중 화장실이 없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의 일터에는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고, 그건 생각보다 흔한 일일 것이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로 그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쯤부터 청소하는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나이 지긋한 분이 새로 오셨고, 그는 늘 눈썰매 같은 것을 손목에 걸고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우리 집 앞의 엄청난 경사를 쓰레기를 싣는 기계가 감당하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썰매 같이 생긴 판판한 널빤지에 쓰레기를 나르면 동네에 ‘두두두'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썰매 끄는 소리가 났다.

몇달 전부터는 익숙한 소리가 나지 않았고, 곧 새로운 얼굴이 보였다. 흰머리가 거의 없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찰나, 제대로 접지 않고 버린 아몬드 빼빼로 통이 그의 손에 쥐여 있는 것을 보고 절로 고개를 돌렸다. 세 집이 사는 작은 주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쓰레기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를 매일 보면서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어느 화장실을 쓰시려나.

1/26

어떤 회사가 사내 의료진을 들여,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주사비만 내고 링거를 맞을 수 있도록 한다는 글을 봤다. 사회초년생 때 갑자기 열이 올라서 일하다 급하게 병원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오늘은 저 진짜 아프면 안 돼요. 중요한 일이 있어요.”

“아파도 되는 사람은 없어요.”

그 말에 합죽이가 됐다. 다시 회사에 와서는 처방받은 진통제를 여러 번 털어 넣었다. “아픈 건 안타깝지만 될 일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유독 오래 일을 하고 퇴근했다. 그날은 회사에 보건실이라도 있어서 잠시 누워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치료해준다'는 행위는 똑같다 하더라도, 그 목적에 따라서 ‘아'다르고 ‘어' 다른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그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서가 아니라, 더 많은 성과를 내 회사에 이바지해야 하니까 가까이에 병원을 둔다는 사고방식은, 어쩐지 더 좋은 고기맛을 위해 사과를 먹이는 가축 농장을 떠오르게 했다.

이 건강 패키지에는 간단한 수준의 심리 지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조치를 두고 회사의 ‘혁신'이라고 평가했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꽤 많은 회사가 이미 의료 및 심리 케어를 지원하고 있다. ‘혁신은 무슨 혁신이야.’ 하면서도, 그 와중에 어쩌면 그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나 같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1/17

저녁 수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아직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집에 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빠듯한데다, 이따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가 이미 밤 9시 30분이었다. 한 참가자는 지난 주 내내 야근이 있었다면서도 명상을 열심히 해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선생님인 내게 미안해했다. 다들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버는지는 몰라도, 밤늦은 시간까지 일한다는 것만은 같구나. 8주 수업 중에 한두 번 정도는 회사 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조지오웰은 한 수필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 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며,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나는 그들을 수업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나로서 살아가겠다며 눈을 부릅뜬 채, 회사가, 그리고 불안이 자신을 잠식시키지 않도록 애쓰며 살아가고 있었다.

A는 회사를 마친 후에 명상 수업에 간다는 것을,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심리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하루 치의 불순물을 비워내고 정리하고서는, 다음 날이면 허둥지둥 립밤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출근하고, 그날 치의 할 일을 했다. 그는 그날 저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억누른 감정을 풀어내면서 우연히 찾아온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는지도 몰랐다. '내가 나를 위해 명상하는 걸까, 더 잘 생산해내기 위해, 회사를 위해 명상하는 걸까?'

수업을 마치고 대관한 공간에서 휴짓조각을 치우면서, 어쩌면 난 조금 다른 종류의 쓰레기를 치우는 자본주의 사회의 청소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대개 각자의 일터에서 시작된, 혹은 일터를 거쳐 온 마음의 짐을 두 손 가득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부지런히 그들의 짐을 함께 풀어내고 분리수거하고 또 비워내기를 반복했다. 가끔은 서로 매번 같은 청소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어차피 내일이 되면 또다시 쓰레기가 쌓일 것이므로, 이 일을 지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언가를 사들이려면 치워야 한다. 물건을 찍어내는 수많은 회사들이 유지되려면 쓰레기를 치우고 보이지 않게 묻는 시스템이 정교하게 잘 돌아가야 한다. 명상과 자본주의는 낙산사에서 실리콘밸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선 명상과 자기 돌봄이야말로 자본주의의 품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일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돌볼 필요가 있고, 자기를 돌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명상 선생님 내지는 상담사라는 이 직업도 이 사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굴러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 사람이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터가 많아진다면, 우리 곁에 서로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면, 사실 이 직업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1/30
마라톤을 신청했더니만, 무료로 신문을 보내준다길래 아침마다 신문을 읽는다. (마라톤은 취소했지만, 신문은 계속 온다. 돈을 내라고 하려나?) 이런 기사가 있었다. 코로나 이후 우울증 등으로 치료받은 환자가 20대 사이에서 51% 늘었다. 지난해 교육부의 심리검사 결과에 따르면 대략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자살 위험군'이 7만 명에 달한다는 결과가 나왔고, 자살 위험군보다는 덜 위험한 상태지만 상담, 치료가 필요한 '관심군 학생'은 25만 명에 달했단다. 저 학생들의 10년 뒤, 20년 뒤(부디 그런 게 있기를 바란다.)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나에게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저 학생들을 본다.

고여 있는 감정의 불순물들,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들을 함께 견딘다. 흐린 눈으로 대충 보고 싶은 구석진 곳의 이야기를 듣는다. 어떤 날에는 쓰레기를 버리지도 못한 채 부둥켜안고 지내는 사람들을 보고서는 왜 제대로 비우지 않는지 답답해하다가, 이내 불쌍해한다. 내 쓰레기를 비우러 치료를 받고 오는 길이면, 그런 나를 불쌍해한다. 아주 가끔은 내일도 반복될 청소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고, 쓰레기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렇지만 쓰레기 앞에서 대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것치고 꽤 유난스러운 글이다.) 그냥 오늘도 할 일이 많구나, 한다. 그리고 밤이 되면 오늘도 부지런히 비질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무엇보다 적당한 화장실이 있다는 것에 만족해 한다. 날 찾아오는 사람들처럼.

덧.

아직도 몇몇 심리학과 교수님들은 상담을 받으러 온 할머니를 부를 때도 반드시 ‘내담자'라고 부르기를 강조하고, 상담사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게 아님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강의실 구석에서 혼잣말로 반박한다. 어떻게 우리만 자본주의를 피해 갈 수 있겠냐고, 그런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건 현장과의 거리임이 틀림없다고. 아무리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어도, 사람들에게 눈물을 훔칠 휴지를 건넬 때, 환불 요청에 응할 때, 내가 정직한 서비스직 감정 노동자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Read More
하윤의 일기 Jiun Kim 하윤의 일기 Jiun Kim

떠나간 화살과 남겨진 활

긴 낮잠에 빠진 어느 날 오후, 꿈을 꿨다.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평소 물건으로 꽉 차있는 우리 집답지 않게 집안이 휑했다. 막 이사를 간 집처럼. 어리둥절하며 집을 둘러보고 있는데 현관에서 손글씨로 빼곡한 편지를 여러 장 발견했다. 엄마 글씨였다. 엄마는 나와 동생, 아빠에게 긴 편지를 썼다. 그녀는 떠난다고 했다. 멀리, 여기서 아주 먼 곳으로. 자주 만나지 못할 거라 했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가 어릴 적 갔던 찜질방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다. 더는 읽을 수 없었다. 손이 떨리고 눈물이 쏟아지고 다리는 힘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엄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구나. 아니, 엄마에게 다른 사람이 생길 리 없다. 그러나 정말 그럴 리 없을까? 엄마는 처음부터 나에게 ‘엄마’였으니 내 입장에서는 가능할 리 없지만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한 사람으로 보자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엄마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아빠는,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고 그들의 마음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동시에 나타났다. 엄마는 내 앞에 아빠는 내 뒤에서. 엄마의 얼굴을 보자마자 왕 울음이 터졌다. 다시 보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보니 우릴 버리고 떠났다는 게 사무치게 원망스러우면서도 다시 나타나줘서 기쁜 울음이 터져 나올 만큼 고마웠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흐릿한 시야 속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아 놓고 애원했다. 

그냥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아빠랑 함께 이 집에서 계속 살아주면 안 될까? 지금까지 잘 그래왔잖아. 응? 

엄마는 내가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엄마는 그저 까마득히 멀어져 가고만 있었다. 뒤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건 말하지 말자… 체념한 듯 무거운 목소리였다. 편지를 다 읽고 나면 아빠 같은 목소리가 되는 걸까. 그러나 아빠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시야에서 엄마를 놓쳐버리면 영영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하지 않는 엄마에게 점점 뭉개지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게 그 사람이 좋아? 우리를 버리고 갈 만큼?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점점 들어갔다.

그제야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누구랑 같이 사는 게 아니야. 혼자 떠나는 거야. 이젠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오랫동안 같이 살았으니까. 

나 어릴 적에 어른들은 종종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잃어버린, 그러나 되찾기엔 이미 늦어버린 얼굴. 커다란 파도에 멀리멀리 휩쓸려가는 무력한 얼굴. 엄마는 그런 얼굴이었지만, 한 구석에서 환하게 떠오르는 노란 햇살의 빛깔이 어렴풋이 비쳤다. 아주 작고 희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빛이었다. 엄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슬픔이 있었지만 슬픔을 건너간 미소였다. 그 순간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이 풀렸고 눈물이 멈추었고 입을 다물었다. 그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나였다.

퍼뜩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일까. 낯선 방, 낯선 시간. 거친 숨소리와 빠르게 흔들리는 눈동자. 뿌연 시야에 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왜 그래? 악몽 꿨어? 

꿈이었나. 꿈이었구나. 낯선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현우의 얼굴이구나. 그제야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터지는 눈물처럼 이야기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리고 난 뒤 숨이 차도록 엉엉 울었다. 어느새 눈물은 얼굴을 뒤덮었고 몸 깊숙한 곳에서 불이 활활 타올랐다. 현우가 연신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가 가족을 떠났어. 살아있는 데 떠났어. 혼자 살고 싶대. 그래서 떠난대. 엄마를 도저히 못 보낼 것 같은데 잡을 수가 없었어. 떠나지 말라고 말도 못했어.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떠나왔으니까. 떠나는 엄마에게서 내가 보였어. 

20년을 꼭 붙어있던 딸이 느닷없이 떠난다고 한다. 잡으려 하니 나를 좀 놔달라고 한다.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하고 가족의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움직이라고 하니 그럴 수는 없다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단다. 눈물이 쏟아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아이의 손을 꽉 잡아보지만 아이는 손을 빼고 고개를 돌린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 할 때면 절박하고 허무한 마음이 된다. 아이는 활을 떠난 화살 같아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앞만 바라보며 쏜살같이 날아갈 뿐이고 부모는 아득히 멀어져 가는 화살을 바라보는 활처럼 우두커니 서있을 따름이다. 

스무 살 이후 나의 삶은 가족으로부터 떠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대학교를 가면서 집을 떠나고, 유럽에서 살아보겠다며 떠나고, 돌아와서는 혼자 자취를 하겠다며 떠나고, 얼마 뒤 연인과 살겠다고 동해로 떠났다. 몇 년 뒤에는 엄마 아빠가 도리어 결혼을 부추겨 공식적으로 독립을 했다. 지금 나는 가족으로부터 떠나는 딸이 아닌 가끔씩 가족을 만나러 오는 손님 같다. 두세 달에 한 번 친정집에 들렸다 돌아갈 때면 엄마는 나를 꼬옥 안아주고 환하게 웃으면서 보내준다. 가지 말라고 두 손을 꼭 붙잡는 게 아니라 잘 가라며 웃으며 안아준다. 언젠가부터 엄마로부터 기꺼이 보내질 때마다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30년 동안 앞만 보고 날아간 화살이 이제야 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게 아니면 이제는 엄마가 나의 화살이 되어 아득히 멀어져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떠나가는 사람이 아플까. 떠나가는 걸 바라보는 사람이 아플까. 처음으로 떠나가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비록 현실이 아닌 꿈이었지만 그것은 너무나 선명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너도 꽤 컸으니 어떤 방식으로든 떠나가는 사람을 바라볼 준비를 하렴, 삶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잠깐 바라보았을 뿐인데 이토록 울어버리고 만 걸 보니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나 보다.

“아이들은 그대를 통해서 왔으며 그대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아이들은 그대의 소유가 아니다. (...)

그대는 아이들의 활이며, 

아이들은 그대를 통해서 살아있는 화살처럼 앞으로 나아가리라.” 

They come through you but not from you, 

And though they are with you yet 

they belong not to you. (...)

You are the bows from which your children 

as living arrows are sent forth. 

Kahlil Gibran의 『The Prophet』 <On Children> 中에서

📌 데자뷰 로스터리 @dejavu_roastery 

커피에 진심인 로스터리 겸 카페. 8종의 필터 커피와 에스프레소 메뉴 모두 본질에 충실하다. 사장님께서 고객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세심하게 추천해 주시고 커피 교육도 적극적으로 하신다. 최근 winter love 라는 이름의 블렌딩 원두가 출시되었는데 커피인지 와인인지 헷갈릴 정도로 특별한 맛이었다. 

쓴 사람 | 하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