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indful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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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나무를 깎는 시간

2박 3일간 평창의 외딴 시골 숙소에서 고요히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머무르는 내내 하루에 한 번 카페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를 잠시 쉬어갈 때마다 여덟 명 남짓 머무를 수 있는 아담한 내부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숫자가 쓰여있는 나무 블록으로 만든 달력, 연필꽂이, 모빌, 도마와 도마 꽂이 등 사장님만의 고유한 미적 감각이 느껴지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사장님께서는 나무를 깎아 물건을 만드는 법을 배워본 적은 없으시고,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오랜 세월 만들어왔다고 하셨다. 

나무를 깎아 만든 물건의 아름다움을 잔뜩 느꼈던지라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우드 카빙에 대한 마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런 마음을 품은 채로 강릉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심 있게 지켜보던 목공방에서 우드 카빙 워크숍을 한다는 인스타그램 글이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마음과 적절한 기회가 잘 맞아떨어진 순간이었기에 나와 짝꿍은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워크숍을 신청했다.

며칠 뒤 목공방이 있는 속초로 향했다. 속초는 강릉과 가까워서 여러 번 가보기는 했지만, 공방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딴 동네에 있었다. 날이 흐리고 해가 질 무렵의 시간이라 거리의 분위기는 다소 어두웠지만, 공방은 두세 개의 주백색 스탠드 불빛 덕분인지 따뜻하고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 한 켠은 공방으로, 다른 한 켠은 직접 만드신 가구들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공간 전체에 향긋한 나무 내음이 가득했다. 따뜻한 색감의 스탠드 조명과 낮은 조도, 진득한 나무 내음, 그리고 목수님의 느긋한 접객 덕분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워크숍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워크숍의 시작은 우드 카빙의 도구인 끌을 익히는 것이다. 끌을 처음 써보았기에 연습용 나무를 깎아보며 도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목수님께서 도구를 어떻게 쥐고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는 알려주셨지만, 어느 정도의 힘을 줘야 하는지는 온전히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힘을 세게 주면 너무 깊게 파이고, 그렇다고 힘을 약하게 주면 잘 깎이지 않는 탓에 적절한 힘을 주는 게 중요한데, 역시나 적당히가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는 끌이 손에 익을 때까지, 원하는 깊이와 너비만큼 일정하게 파낼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연습했다.

일정한 크기로 깎아내기 위해 마음을 모으다 보니 들쭉날쭉했던 모양새들이 제법 일정해졌다. 처음이다 보니 완벽하게 할 수는 없기에 ‘이만하면 충분하다'싶은 선에서 만족했다. 목수님께서도 ‘이제는 실전으로 넘어가도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기지개를 크게 한 번 펴고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짝꿍은 동그란 모양의 컵 받침대에 초승달을 그려 넣었고, 나는 네모난 모양의 컵 받침대에 벌집 패턴으로 깎아보기로 했다. 일정하게 잘 깎아보고 싶은 마음에 연필과 자로 첫 줄이 시작되는 지점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그러고는 끌을 들어 숨을 크게 내쉬고는 하나씩 천천히 파내기 시작했다. 세로로 길쭉한 육각형 모양의 벌집 구멍 하나를 깎아내기 위해서 두세 번의 끌질을 해야 했는데, 육각형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손으로 톱밥을 털어내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는 원하는 깊이와 길이만큼 깎였는지 확인했다. 

한 줄에 열네 개의 육각형이 있었고, 그렇게 총 열두 줄을 깎아내야 했다. 두 줄을 깎아낼 때마다 다소 참아왔던 숨을 푹 내쉬며 긴장되어 있던 팔과 어깨, 그리고 목을 한껏 풀어줬다. 나무를 처음 깎으면서 가장 어렵게 느낀 건 팔에 힘을 빼는 일이었다. 손과 팔은 끌의 위치와 방향을 잡아주고, 몸에 힘을 주어 나무를 깎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팔에만 힘이 들어가서 팔과 어깨가 금세 경직되기 일쑤였다. 처음 연습할 때는 ‘팔에 힘을 빼고 몸에 힘을 줘야지'라고 스스로 되뇌었는데, 어느새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걸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처음이니까 힘이 좀 들어가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팔과 어깨에 피로가 쌓이는 것도 경험이고, 그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자연스레 팔에 힘을 빼고 나무를 깎는 요령을 터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깎아내는 작업을 모두 마치고는 나무가 물에 닿아도 썩지 않도록 오일을 발라줬다. 오일을 나무에 도포하여 검지로 꼼꼼하게 펴 발랐다. 미끄러운 오일을 거친 나무에 입혀줄 때, 어린아이가 촉감놀이를 하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 완성을 하고 나니 매끈해진 나무의 느낌이 좋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요리조리 각도를 바꿔가며 음영에 따라 달라지는 깊이감을 음미하기도 했다.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볼펜과 카메라에 익숙해진 손이었는데, 끌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써보니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작은 물건들은 직접 만들어서 써도 좋겠구나!’ 어떠한 물건이든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만드는 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걸 느낀 시간이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일에 더 힘쓰는 분위기가 되면 물건은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드 카빙 워크숍을 마치고 며칠 뒤 애정 하는 책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다시 읽었다.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같은 용도의 물건을 살 수 있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애쓰며 깎은 물건이라 그런지 컵 받침대를 쓸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피어오르며 괜히 한 번 더 만지작거리게 된다. 오랜만에 직접 만든 물건을 써보니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쉬워질수록 물건에 대한 애정도 덜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종종 물건을 직접 만들어 쓰며 소소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 퐈이어빈

강릉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지만,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때로는 마실 버스를 타고 찾아간다. 바닐라 라떼가 없는 아쉬움은 홍천산 헤이즐넛 라떼로 잊혀진다.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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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목욕탕의 날

두 달 동안 3개의 지원 사업에 도전했다. 그간 기획, 디자인, 촬영, 제작 모두 아내와 나 둘이서 해왔는데, 각 분야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분들과 협업해서 브랜드를 새롭게 리뉴얼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지원 사업은 처음이라 ‘한글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도 익숙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업 계획서 쓰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이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다. 제일 중요한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은 심사위원에게 우리의 일이 지원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은 심사위원에게는 지원금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인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논리적이면서도 쉽게, 적절한 근거를 갖추어 전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수정에 수정을 더하며 마감기한 내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날들이 쌓여갔다.

드디어 지원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그토록 기다려온 마감 없는 기쁨을 즐기기로 했다. 우선 아침에 여는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기다려온 시간이었다. 지원 사업을 하면서도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시간 정도는 있었지만, 마감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책을 읽고 있어도 내용이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온전히 쉬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낮잠을 자며 몸을 쉬어주는 게 나았다. 한편 마감이 없는 가뿐한 상태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 바로 카페에서의 책을 읽는 시간이다. 세 면이 모두 통창으로 되어 있는 이 카페는 환한 빛이 가득 들어오고, 층고가 높아 답답함이 없고, 우리가 좋아하는 북유럽 브랜드의 가구들로 단정하게 채워져있어 우리가 유독 좋아하는 곳이다. 볕이 풍부한 날,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쉬고 있다'는 달콤한 느낌을 한껏 만끽했다. 

그리고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사실 오늘은 목욕탕의 날이다. 추운 겨울 내내 목욕탕이 그리웠는데, 일 때문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새 '오늘 좀 더운데...' 할 정도로 봄날이 되어버렸다. 목욕탕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추운 날씨에 가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익히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동안 일기장에 종종 ‘뜨거운 탕에서 피로를 풀고 싶다'는 말을 몇 번 적었으니, 길게 고민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각자 1시간 반 동안 시간을 보내고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일 점심 시간이 막 지난 때라 목욕탕에는 다섯 사람 정도만 있을 뿐, 널널하게 비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탕에 첫 발을 담그는 순간, 다리에 찌릿함이 느껴졌다. 뜨거운 온도에 적응하기 위해 처음에는 종아리 까지만 담갔다가, 괜찮아지면 앉은 채로 다리를 담그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용기를 내어 얼굴만 쏙 뺀 채 온 몸을 담갔다. 그렇게 머리를 벽에 기대고 반쯤 누운 듯 판다처럼 퍼져있으니 몸은 완전히 이완되고, 피로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다음은 냉탕이다. 냉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너무 차가울 것 같은데…’하는 생각에 들어가는 게 조금 꺼려진다. 하지만 작년 여름 핀란드의 습식 사우나에서 뜨겁게 몸을 지지고, 열기를 몸에 가득 품은 채 차가운 호수로 들어갈 때의 짜릿함이 떠올랐다. 찬물에 대한 두려움과 쾌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한 번에 몸을 풍덩 담그기 보다는 안전 손잡이를 잡고 발부터 천천히 차가움을 느끼며 서너 개의 계단을 내려갔다. ‘으…’ 소리를 내며 양 손을 겨드랑이에 파묻었다. 냉탕의 온도에 점차 익숙해질 즈음, 과감하게 잠수를 해서 머리 끝까지 몸을 적셨다. 온탕에서는 피부가 늘어지며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라면, 냉탕에서는 피부가 쫀쫀해지며 생기로움이 돋아나는 느낌이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칫솔 하나와 때밀이 수건 하나가 소유물의 전부다. 스마트 폰을 들고 갈 수도 없고, 메모지나 펜을 들고 갈 수도 없다. 물에 몸을 담그는 일과 때를 미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정신적으로도 푹, 쉬는 느낌이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뜨거움과 차가움에 적응하다 보면 어떠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물의 온도에 적응하며 뜨거움과 차가움을 온전히 느끼고, 목욕 의자에 앉아 지우개 똥 마냥 계속해서 나오는 묵은 때를 힘껏 벗겨낼 뿐이다. 깨끗하게 때를 밀고, 다시금 온탕과 냉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피로를 풀기에 목욕탕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목욕재계의 시간을 마치고 아내를 만났다. 우리 둘 모두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눈은 반쯤 풀어졌다. 목욕탕 건물을 나서니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이제는 바람에 날카로운 찬기는 온데간데 없고 따뜻한 부드러움만 깃들어있었다. 어디선가 꽃내음도 느껴져서 ‘이제는 정말 봄이구나…’ 싶었다. 몸은 한껏 이완되었고, 따뜻한 봄바람에 꽃내음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툭 풀어졌다. 당장이라도 풀밭에 누워 낮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나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 기분 좋은 나른함에 취해 편의점에서 비타500 큰 병을 사서는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좋은 기분을 이어갔다. 

‘휴식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하는 법도 모른다.’

오전에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만난 문장이다. 내가 경험한 좋은 쉼 중 하나는 지금의 계절을 느끼며 유유자적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바쁜 속세에 메이는 것 없이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하루.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풀어주고,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는 걸 느끼고, 집에 돌아와서는 포근히 낮잠을 잤던 오늘처럼.

 ☀︎ 사임당커피

창문에 비친 소나무의 그림자를 보며 쉬어갈 수 있는 카페. 작년에 북유럽 여행을 다녀와서인지 북유럽 가구와 조명들로 꾸며진 카페가 더욱이나 마음에 든다.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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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썰매 타는 어른들

카니발 차에는 다섯 명이 있었다. 애정 하는 동네 책방 사장님 부부와 아이들 셋. 거기에 우리 부부 둘이 더해져 일곱 명이 한 차에 타고 강릉에서 평창으로 향했다. 여행은 한 달 전에 계획되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사장님은 우리에게 초등학생 첫째 아들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데, 언제 한 번 눈 쌓인 곳으로 출사를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우리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날 아침, 세 명이 더 합류했다. 둘째와 셋째, 그리고 아내분도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그 이유인즉슨 이틀 전부터 눈이 펑펑 내렸기 때문이다. 강릉보다 눈이 더 많이 오는 평창은 또 얼마나 많은 눈이 쌓여있을까. 분명 특별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름다운 주말, 아빠와 오빠만 좋은 곳으로 보내기엔 분명 아쉬웠을 테지. 그렇게 모두가 함께 놀다 오기로 했다.

아이들과 처음 만난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살았기에 종종 사장님과 책방 출근을 함께 하곤 했는데, 사장님이 차로 아이들을 등교시켜주고 출근하다 보니 아이들 등굣길에 함께하며 안면은 튼 상태였다. 만날 때마다 아빠가 ‘안녕하세요 해야지'라고 하면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는 차에 타 있는 내내 조용히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놀러 가는 날이라 마음이 활짝 열린 걸까.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아기 새들처럼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쫑알 쫑알 대기 바빴다.

제설차 기사님들이 도로의 눈을 부지런히 치워주신 덕분에 곤혹을 치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옆으로 펼쳐진 눈꽃 풍경들이 깔끔하게 치워진 도로와 대비되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멀리에는 눈으로 뒤덮인 하얀 산에 깃발처럼 꽂혀진 풍력발전기가 보였고, 가까이에는 무거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들이 고개를 푹 떨구고 있었다. 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들은 고동색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눈에 뒤덮여 있있다. 보통 바람의 방향에 따라 나무의 한쪽 면만 눈이 쌓이기 마련인데, 이를 보며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새삼 실감했다. 이렇게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파묻힌 풍경을 보는 건 아이들이나 우리나 처음이라 ‘우와, 우와!’ 소리 내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평창의 실버벨 교회로 향했다. 언덕 위에 돌로 지어진 소박한 교회인데, 언덕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회색빛 교회와 대비를 이루었다. 주차장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았지만, 교회 내부에는 단 한명 뿐이었다. 그 사람마저 교회를 구경한다기 보다는 난로 곁에서 불을 쬐고 있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해 보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에 있었냐하면, 교회 밖에서 각자만의 눈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김치통을 가져와서 이글루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각자의 썰매를 가져와서는 언덕에서 신나게 썰매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창으로 가는 길에 아이들은 썰매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그것도 무려 다섯 개나! 그때부터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썰매를 탈 생각에 가슴이 두근댔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 썰매를 타는 게 오늘의 목적인 사람처럼. 썰매를 타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 일이라, 오랜만에 썰매 탈 생각에 마음이 들떴나 보다. 교회를 목적지로 두고, 출사 여행을 왔으니 교회 내부를 훑어보기야 했지만, 마음은 이미 썰매를 타고 있었다. 그 사이 사장님과 첫째 아들이 차에서 썰매를 가져왔다.

그곳은 상업 썰매장이 아니라 그저 경사 높은 언덕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곳이 원래 썰매장인 것처럼 그럴싸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사장님에게 썰매를 건네받은 나는 출발점에 섰다. 썰매에 앉아서 아래를 보니 생각보다 경사가 급해 보였고, 끝에는 나무 덤불이 있어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타서인지, 안전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살짝 긴장이 되어 썰매 줄을 꼬옥 잡았다. 그러고는 두 발로 바닥을 밀어 썰매에 몸을 맡기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내려가기 시작하자마자 소리를 냅다 질렀다. 조금 무섭기도 했고 동시에 아주 신나기도 했는데, 시시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릴 있었다. 언덕의 끝자락에는 거친 나무 덤불이 자리해있어서 거기에 푹 처박히고 싶지 않으면 속도를 줄여야 했는데, 양발 뒤꿈치로 최대한 브레이크를 밟다 보니 몸과 얼굴에 눈이 한가득 튀었다. 덤불 앞에서 눈을 한껏 뒤집어 쓴 채 겨우 멈춰 서는 ‘하아~’하고 철퍼덕 드러누웠다.

아이들과 누가 더 멀리 가는지, 누가 더 빨리 가는지 시합을 하기도 하고 2인 1조가 되어 앞뒤로 사이좋게 타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찌나 재밌어하던지, 연신 눈을 뒤집어 쓰면서도 깔깔깔 웃었다. 내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과 아내의 표정을 보며 내 표정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둘째는 발자국 하나 없는 하얀 눈밭에 벌러덩 눕더니 소금쟁이처럼 팔다리를 쭉 펴고는 위아래로 휘적거렸다. 나는 여분으로 가져온 옷도 없고, 눈이 몸 안으로 들어갈까 봐 드러눕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눈이 몸에 들어가든 말든, 감기에 걸리든 말든, 갈아입을 여분의 옷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벌러덩 누워서는 헤헤 웃었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도 없이 최선을 다해 신나고 재밌게 놀았다. 덕분에 그들과 함께 있는 나 역시도 아이처럼 순수하게 놀았다. 누군가 보기에는 어른인 내가 아이들을 잘 놀아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나는 내가 그들의 또래 친구가 된 것처럼 신나게 놀았다.

썰매를 다시 타기 위해 언덕을 오를 때면,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썰매를 타는 어른들이 보였다. 오랜만에 썰매를 타서 신이 났는지 깔깔깔 소리 지르며 행복하게 노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고, 덕분에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으레 어른의 모습을 떠올리면 얼굴은 피곤해 보이고 몸은 무거운 짐을 짊어진 듯 축 처져있는데 반쯤 정신을 놓고 소리를 지르며 썰매를 타는 그 어른들은 누구보다도 해맑고 순수한 어린아이들 같았다.

저녁이 되어 다시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는 ‘오늘 하루 짱 재밌었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 셋 모두 잠에 들었는데, 첫째는 자신의 소중한 카메라를 바닥에 떨어뜨렸는지도 모를 만큼 깊이 잠에 들었다. 갈 때는 모두들 쫑알대기 바빴는데, 모든 체력을 다 쏟아냈는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앞으로도 온 힘을 다해 신나게 놀며 많이 웃기를, 그리고 행복하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들은 내 이름도 모를 것이다. 그들에게 우리의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나. 그저 하루 재밌게 놀았으면 그만인 것을. 눈싸움 아저씨 정도로 기억되려나.

☀︎ 에스프레소 스퀘어 @espresso_square

커피 맛에 대해 잘 모르지만, 에스프레소 스퀘어의 커피가 맛있다는 건 안다. ‘어떻게 커피에서 이런 맛이 나지?!’ 초콜릿 향 풍미가 깊이 느껴지는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면, 집 주변에서 이런 원두를 살 수 있다는 걸 행운으로 여기게 된다. 강릉역 인근에 있으니 강릉을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들려보기를!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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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매순간 균형을 이룬다

2kg만 더 찌면, BMI 지수상 ‘비만'이다. 저체중이었던 몸무게는 정상 체중을 지나, 과체중의 끄트머리에서 비만을 앞두고 있다. BMI 지수, 그게 뭐가 대수냐 싶지만… 눈바디를 해봐도 ‘이제 살을 좀 빼보는 게 어때?’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때는 너무 말라 젓가락이니 빼빼로니 온갖 얇고 길쭉한 물체들이 모두 다 내 별명이었는데, 이제는 살을 빼야 하는 상황에 실소가 나왔다. 헬스장에서 격한 운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턱걸이와 스쿼트, 그리고 팔굽혀펴기와 같은 맨몸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기에 운동을 하는 시간이나 강도를 늘리기보다는 식단을 조절해 보기로 했다. 습관은 하기 쉬워야 오래 할 수 있는데, 운동량을 늘리는 것보다 먹는 걸 줄이는 게 더 쉬워 보였다. 아침과 점심은 그대로 먹고, 저녁 식사만 간소하게 줄여보기로 했다. 미숫가루 한 잔, 두세 종류의 과일, 그리고 하루 견과 한 봉이 저녁 식사의 전부였다. 걱정과 달리 식단을 조절하는 건 힘들지 않았는데, 오히려 잘 먹지 않던 과일과 견과류를 먹으니 식사가 몸에 더 잘 맞아서였을까.

문제는 배고픔을 너무 빨리 느낀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도 금방 배가 부르고 빨리 배고픔을 느끼는 편인데, 식단을 바꾸고 나서는 배고픔이 더 심해졌다. 원래 먹던 대로라면 잠에 들기 전까지 배고픔을 전혀 느끼지 않았는데, 저녁 9시만 되어도 극심한 배고픔이 찾아왔다. 짝꿍은 내가 배고파 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면서도 웃겼는지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으며 이렇게 물었다.

“몸 상태가 어떠세요?”

“책을 읽고 싶은데요… 배가 고파서 집중력이 없어요…”

“뭐 먹고 싶어요?”

“뭘 먹고 싶은 건 아닌데요. 먹으면 맛있게 먹죠." (어이없이 웃는 짝꿍의 웃음)

“그러니까 지금 뭘 먹고 싶어요?”

“(질문이 끝나자마자 냉큼) 떡볶이요”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 ‘배고파… 배고파…’ 외치며 짝꿍의 질문에 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을 다시보니 무척이나 웃겼다. 배고프면 주섬주섬 뭔가를 먹을 법도 한데, 배고픈 게 힘들면서도 더 먹지는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니 배고픔을 느끼는 시간이 점점 더 늦어졌다. 밤 9시만 되어도 배가 고프던 게 11시 즈음이 되어서야 배가 고팠고, 어느 날에는 잠에 들 때까지도 ‘배가 고프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도 했다. ‘이제는 음식물이 이만큼만 들어오는군. 자기 전까지 잘 분배를 해야겠어!' 몸도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식단을 조절한지 두세 달의 시간이 흐르고, 체중계에 올랐다.

‘와… 이렇게 안 빠졌을 수가!’

1kg 조금 넘게 줄기는 했지만, 기대한 만큼의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다지 좌절스럽지 않았던 이유는 다른 좋은 변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잠에 들기 전까지도 속이 더부룩한 편이었는데, 식단을 바꾼 이후로는 속이 편안하여 잠을 더 깊게 잘 수 있었다. 또, 식사를 준비해 주는 짝꿍의 입장에서는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고, 요리하는 시간과 수고도 줄어들었다.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하는 내 입장에서도 뒷정리하는 시간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건 ‘절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실감하는 것이다. 짝꿍이 찍은 영상 뒷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더 있다.

“뭘 먹고 싶어요?”

“떡볶이요. 근데 내가 지금 살찌는 거 때문에 안 먹는 게 아니에요.

절제에 대한 연습으로써 안 먹는 거지. 채울 수 있지만 채우지 않는 거예요.”

“(반어적 뉘앙스로) 하… 참 대단한 도반이세요…”

배고픔에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이라 생각하고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꽤 의미가 있는 말이라 느껴지는 건 두 달째 절제를 매일 훈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배고픔을 느끼면, 무언가를 먹으며 배고픔을 해소하고, 더 나아가서는 배부름에 만족감을 느끼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배고픔을 채우려고 하기보다는 배고픔을 느끼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배고픔을 채워줄 수도 있지만 채워주지 않는 선택지도 생겼달까. 이름을 붙여주자면, ‘배고픔과 거리 두기'가 가능해졌다. 물론, 극심한 허기를 느낄 때까지 굶지는 않지만, 참을만하면 참아보는 것도 나만의 적절한 ‘정도’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느꼈다. 

내게 맞는 적절한 ‘정도’를 찾고, 스스로 조절하며 삶의 균형을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 물어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더더욱. 사람마다 ‘부족하다'거나 ‘지나치다'고 느끼는 정도가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몸의 변화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정도라는 게 달라지기도 하니까. 잘 살아간다는 건 ‘매 순간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닐까. 지금이 나아가야 할 때인지 멈출 때인지, 채울 때인지 비울 때인지, 변화해야 할 때인지 받아들여야 할 때인지를 알고 균형을 이루는 것.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내가 할 일은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일이다.

명주상회

인도에서 공수해온 재료를 듬뿍 넣어 짜이를 만드는 곳. 여행객이라 자주 들를 수 없다면, 집에서 만들어 마실 수 있는 짜이 키트도 추천!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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