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Mindful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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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언의 일기 Jiun Kim 지언의 일기 Jiun Kim

진실을 말하기

정말이지 생각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 살 아이에게 물어봐도 그 나름대로는 이 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련하기 짝이 없는 (세 배도 더 산) 나는 머리로, 몸으로 알고 있다고 잘난 체 하면서도, 또 막상 상황이 닥치면 '이번만큼은 다르겠지. 생각대로 되겠지'하는 안일한 생각에 빠지고야 만다. 미칠 노릇이다.

최근에 일이 틀어질 위기에 처했다. 이미 수십 번은 엎어지고, 또 멤버가 바뀌고, 방식이 바뀌면서 진행되어 오던 프로젝트였다.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주말 아침에 미팅을 잡았다. 미팅을 앞두고 아침에 산을 걷고 돌아와 쑥차에 뜨거운 물을 부어둔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내 안의 목소리가 많은 것들을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Sister True Dedication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한 법문에서 “두려움과 함께할 수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 건가요?” 질문을 던지는 부분을 찾았다. 눈빛, 목소리가 화면을 뚫고 나에게 닿았다. 순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손끝 발끝까지 피가 통하는 느낌이 들고,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동료, 친구를 잃을 두려움. 생계 수단을 잃을 두려움. 진실을 충분히 말하는 일의 두려움. 또 진실을 마주하는 일의 두려움. 두려움이 한 줌 덜어져 있었다. 다 우려진 쑥차를 빈 찻잔에 따르고, 다기를 다루듯 마우스를 굴려 미팅 링크를 눌렀다.

미팅을 시작하고 단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모두 부은 얼굴로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말 아침 10시 30분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느린 속도로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경직된 내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화면에서 얼굴이 보이는 창을 제거했다. 그제야 조금은 그들과 함께 있는 듯했다. 첫 몇 번의 상호작용에서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행이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발언할 차례가 왔다. 미리 메모해 둔 나의 입장을 천천히 살폈다. 횡설수설하고 싶지 않았다. 상대의 의견 중 몇몇 부분은 일방적인, 부당한 요구로 다가왔으며, 그걸 전달한 방식도 적절치 못하게 느껴졌다고 이야기했다. 괄호에 넣었던 상세한 나의 입장을 풀어내는 시간이었다. 내가 전하려 한 건 조금도 꾸미거나, 가리지 않은 내 솔직한 의견이었다. 업무에 대한 것이었고, 파트너십에 대한 것이었으며, 늘 그렇듯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상대가 한 실수도 많은 부분이 감정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나도 감정에 대한 부분도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내가 말했다는 건 누군가 들었다는 것이다. 반대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의 진실을 가만히 들었다. 회의 시작부터 우리 모두에게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을 때 내게 말하지 못한 진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때때로 쉬어 가기도 하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했지만, 적당히 숨기거나 미사여구를 달지 않았다. 두려웠지만 멈추지는 않았고,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았다. 진실을 충분히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었고, 숨통을 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렵고 무섭더라도, 함께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믿으며 조금 더, 조금 더 나를 내몰았다.

To lose the power of confrontation is to lose the power of unity.

대립할 힘을 잃는 것은 유대할 힘을 잃는 것과도 같다.
- 책 <그린라이트>


*

‘혹시 카드 아저씨인가?’

카드를 배송해 주시는 아저씨 전화를 번번이 놓쳤다가 최근 크게 한 번 혼이(아직도 억울하다.) 났던 지라, 전화가 오면 작은 두려움이 일어나는 걸 느낀다. 내 하루를 마음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로 묘사한다면 두려움과 두려움 사이를 갈지자로 걷는 모양일 것이다.

소중한 관계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그저 그런 관계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나는 왜인지 그런 것도 두려워한다.), 소속된 곳에서 쫓겨날 것에 대한 두려움. 거절과 배제에 대한 두려움. 평가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지 못할까, 아니 비난받고 평가받을까 두려움. 생계 수단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아끼는 이곳이, 내가 아끼는 이 관계가 변화할까 봐 두려움. 진실을 말하는 일의 두려움. 또 다른 진실을 마주하는 일의 두려움. 지극히 사소한 두려움에 ‘이 정도쯤이야.’하고 콧방귀 뀌다 정신 차려보면, 거대한 두려움에 도망치는 나를 만난다.

그중에서도 진실, 특히 나의 진실을 말하는 일은 언제나 내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는 일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었던 것 같다. 진실을 내 속이 후련할 만큼 드러내 보이고 싶었지만,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쓰기가 시시하고 재미없었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그때는 겁이 많아 움츠러들었던 시기였다. 너무 둘러 이야기하다 보니 부분적 진실이었거나, 너무 흐린 진실이었거나, 애당초 진실이 아니었다. 지금도 종종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부모님이 걸리고, 때로는 매주 보는 회원들이, 누군가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때로는 그냥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누가 볼까 봐.’ 단지 그뿐이었다. 읽히기 위한 글을 쓰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생각이 너무 급진적일까 봐, 누가 나를 틀렸다고 할까 봐, 진실을 표현하면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거나, 평가하거나, 오해할까 봐 두려워하는 줄 모르는 채로 두려워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쓰기의 중요한 목표가 된다면, 그렇게 써낸 글은 모두 버려도 좋을 것이다. 틀림없이 재미도, 감동도 없을 것이다. (그런 글들을 많이 써봐서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나의 진실’을 충분히 열어 보이지 않고 누군가와 친구 될 수 있는가. 반대로 ‘그의 진실'을 마주한 적 없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진정으로 도타워졌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친구가 되고 싶을 수는 있지만,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된 적은 없다. 진실을 충분히 보이지 않고는 진정한 연결을 경험할 수 없었다. 연결되려면 진실을 보일 힘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진실을 내보이기를 쉽게 포기해 버려서는 안 된다.

두려워하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친구가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진실을 쓸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안전한 변두리에서 그저 그런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두려워하면서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진실을 꺼내둘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것도 말이 쉽지, 진실을 꺼낸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두려운 일이다. 그때 그 두려움을 헤쳐 나갈 유일한 동기부여책은 연결이다. 결국은 내가 원하는 깊이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서다. 미래의 나에게 용기가 필요한 날이 온다면 말해주고 싶다. 진실을 내보이는 일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어찌 됐든 계속 꺼내보라고, 용기를 짜내라고 말이다.

📌 호랑이커피

서촌에도 호랑이 커피가 있다. 간판에는 'latte'라고 쓰여 있어서 혼란스럽지만 거기가 맞다. 진정한 라떼 맛집 다운 간판이다. 바깥은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하고 사람으로 붐비는 골목인데, 가게 안에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신기한 공간이다. 안에는 친환경 건축 자재인 '헴프크리트'를 사용했다고 한다. 자리가 얼마 없어 매장 내부에서 마시려면 눈치 게임을 해야 한다. 환경에 대해 생각하는 곳이라 텀블러 할인 폭이 꽤 큰 것이 장점이니(감동!), 텀블러를 갖고 가서 테이크아웃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요가 아이템을 좋아한다면 근처 타하타, 부디무드라 등 쇼룸을 구경하다가 인왕산을 오르는 코스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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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의 일기 Jiun Kim 영은의 일기 Jiun Kim

내가 한다는 오래된 자만

어제는 밤새 비가 내렸다. 아침에는 해가 떴는데 낮이 되자 돌풍이 불면서 먹구름이 드리웠다. 요즘은 새벽 6시가 조금 넘으면 이마 위로 햇살이 쏟아진다. 내 방은 동향이라 해가 뜨는 시간의 변화를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다.

‘아 오늘은 날이 맑게 갰구나.’

자네와 함께 뒷산을 올랐다. 비가 온 다음 날의 산은 어제와 다르다. 발바닥에 닿는 흙이 폭신폭신하다. 이미 다 져버린 줄 알았던 아카시아 향이 진한 존재감을 전한다. 자네가 쉬를 하는 동안 나도 잠시 쭈그려 앉았다. 개미가 나무 위를 오르고 진딧물이 식물의 줄기를 걸어 다닌다. 나뭇잎 위에서 어제는 구름이었을 물방울들을 보았다. 구름은 그렇게 여전히 살아있다.

최근에 수련하고 있는 호흡 명상은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숨 쉰다고 생각했다. 들이마실 때 힘을 써서 들이마시고 내쉴 때도 내뱉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숨 쉬기를 위해 무언가 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저 숨이 내 폐로 들어오게 허락하고, 그저 숨이 내 폐에서 나가도록 허락만 하면 되었다. 나는 비로소 숨을 즐길 수 있었다.

전국의 오르지 않은 산이 없는 친구 아버지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산에 간다’고 말한 적 있었다. 몇 년 전에 들은 그 말이 문득 떠올라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내가 걷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땅이 나를 밀어주기 때문에 걸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산에 오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산에 갈 수 있다. 나는 내가 앉는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의자와 바닥과 지구의 중력이 나를 받쳐주기 때문에 비로소 앉을 수 있다. 나는 내가 숨 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숨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폐가 없었다면 나는 숨 쉴 수 없을 것이다. 넉넉한 산소, 햇살과 바람, 비와 구름, 나무와 흙, 개미와 진딧물이 있기에 나는 숨 쉴 수 있다.

‘내’가 한다는 오래된 자만이 부끄러워졌다. ‘내’가 쓰는 글, ‘내’가 하는 말, ‘내’가 만드는 제품, … ‘내’가 한다는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더 많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살아있는 동안 더 많은 글을 읽고 더 많이 쓰고 싶었다. 더 많은 의미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했다. ‘나’는 많은 것을 만들어냈지만 더 많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느꼈다. 그건 모래 위에 쌓은 성처럼 위태로웠다. 사실 내가 홀로 하고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내’가 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빈자리가 생길 수 있게 했다. 그 자리는 비어있는 듯하더니, 어느새 새벽 6시의 일출과 비 온 뒤 산길의 흙 향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이내 비워졌다.

 ☀︎ 넬쿠오레델 커피로스터스

무언가에 진심인 사람을 보면 가끔 고집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걸 고집이라고 보지 않고 그에게는 져버릴 수 없는 진리나 진실이 있다는 것으로 본다면 그런 태도가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10평 남짓되는 작은 공간에서 로스팅과 브루잉을 같이 하는 넬쿠오레델은 자신의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커피를 대한다. 그래서 커피 한 잔을 내리는데 다소 긴 시간이 걸린다. 콜드브루도 당일 픽업은 안 되고 3~4일 전에 미리 예약해야한다. 그래도 계속 이곳을 찾게 되는 건 한 번만 마셔보면 알게 된다. 

쓴 사람 | 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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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윤의 일기 Jiun Kim 하윤의 일기 Jiun Kim

달을 따라 가다 보면

3월의 보름달을 만나러 평창의 어느 고요한 시골집에서 2박 3일간 머물다 왔다. 상업 시설이라고는 단 한 곳의 카페뿐, 구멍가게조차 없는 동네라 시내 마트에서 3일 치 식재료를 구입해 너른 하늘 아래 조그만 황토집에 도착했다. 실은 바로 그 비밀스러운 카페를 방문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대중교통으로는 영 가기 힘들어서 오래전부터 ‘가고 싶다’는 마음만 갖고 있었는데 마침 가까운 곳에 숙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고민 없이 머물기로 한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일기장이랑 책을 들곤 털레털레 걸어 나무 오두막을 닮은 카페로 천천히 들어갔다. 애정 하는 클래식 FM <세상의 모든 음악> 전기현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부드러운 나무 내음과 함께 다가왔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니 좋고, 근사한 솜씨로 나무를 무언가로 바꾼 풍경에 충만하다 못해 벅차올랐다. 출렁이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자 몇 번의 큰 숨을 내쉬고, 바 테이블에 앉아 둘레를 살펴보았다. 눈앞에는 작은 나무조각들이 있었다. 둥글게 깎은 윗부분에는 거친 나무껍질이 남아있었다. 그곳엔 작은 별 같기도 작은 생명의 발자국 같기도 한 동그라미가 총총총 줄지어 파여있었고, 평평한 아랫부분에는 손글씨로 문장이 쓰여있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인다고 합니다.’

‘누군가를 초대한다는 것은 그가 내 집 지붕 아래 있는 동안 그의 행복을 책임지는 일이다.’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사 바랭)

조그만 나무조각을 대수롭게 보는 사람, 구석구석을 사랑스럽게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언어들. 이 나무를 깎은 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언어의 향기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비밀스럽게 속삭여주고 싶었나 보다. 나무로 만든 물건이 가득한 이곳에는 팔기 위해 만드는 손길이 아니라 정성껏 만들기 위해 만든 손길이 있다. 즐거워하는 천진한 미소가 보이는 손길. 그 조각들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려보고 있으니 ‘그렇지, 아름다움은 이런 거지.’ 고개를 끄덕인다. 복제된 그림 몇 천장이 아닌 손으로 그린 그림 하나, 나무를 조각하여 그 위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에 찍어내는 판화, 공장에서 몇 천 권 찍어내는 공책이 아니라 손으로 딱 한 권 엮어내는 공책, 건조한 문자메시지가 아닌 마음의 풍경을 닮은 엽서를 골라 한자 한자 손글씨로 쓰인 편지… 이곳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어서 구석구석 빠짐없이 음미하고 싶다.

사람들이 공간을 즐기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이 좁은 공간에서 더 좁은 공간인 스마트폰에 빨려 들어갈 듯 시선을 집중하고 있고, 누구는 미소를 띤 채로 벽 어딘가에 시선을 두며 자기에게만 보이는 것을 어여뻐하고 있고, 누구는 커피의 맛과 향에, 또 누군가는 공간지기와의 대화에 집중한다. 물론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이도 있다. 음미하고 향유하는 공간이 아닌 소비하는 공간으로 보는 사람이 그렇다. 커피의 맛이 어떻고, 공간이 어떻고, 운영방식이 어떻고… 비좁은 자기 세계의 틀을 넘어서지 못한 채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 바쁜 그는 이곳이 놀이터임을 보지 못한다. 향기로운 공간은 향기로운 시선과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났을 때 그 향기가 피어오르는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을까?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맑은 영혼이 담긴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곳에 가득한 ‘만드는 마음’에 푹 빠져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나에게 말을 건다. ‘이래도 쓸모없다고 고개를 돌릴 테야?’ 쓸모없기에 쓸모 있는, 그런 이유로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는 ‘그 아름다움’을 만드는 손길이 바로 내 앞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황토집으로 돌아와 빵과 고구마를 굽고, 평창 목장에서 만들어진 요거트와 평창 사과를 꺼내 풍성한 저녁식사를 만들어 먹었다. 사과는 끝물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늘 수확한 사과라 그런지 아삭아삭한 식감에 달콤한 맛이 팡! 터져 나오는 게 까다로운 사과 애호가로서도 깜짝 놀랄 맛이었다. 평소와 다른 주방에서 요리를 하니 작년에 북유럽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숙소에서 수십 가지 요리를 했던 시간들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 인덕션도 못 다루고 오븐 사용법도 몰라서 엄청 헤맨 데다가 오븐에 구운 닭고기를 꺼낼 때 환기장치를 미리 켜놓지 않은 탓에 화재감지기가 끔찍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지… 고개를 황급히 젓게 되는 아찔한 실수들 덕분에 여행을 하면서 밥을 만들어 먹는 일이 한층 능숙해졌다.

음력 2월 14일, 보름달이 되기 하루 전 달은 황혼을 막 지난 짙푸른 하늘 가운데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로서 약간 찌그러진 보석 알의 모습을 하고 산 위로 떠올랐다. 달빛을 교란하는 인공 빛이 없고 하늘을 조각내는 건물이 없는 곳, 어둠에 고이 숨죽인 산과 나무들 위로 희미하고 영롱하게 달빛이 길을 내고 있었다. 잠에 들기 전까지 달과 별을 보기 위해 연신 들락날락했다. 문을 열면 순수한 어둠 속 자연의 보물들이 살랑살랑 춤추는 광경을 당장 만날 수 있다니, 이토록 쉽게 유유한 달의 헤엄을 바라볼 수 있다니… 그 향기로운 실감을 되풀이하며.

다음날 아침, 산 넘어 해가 환히 얼굴을 내민다. 일기를 쓰고 있는데 틱틱틱틱 소리가 나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벌레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시골에서 벌레가 나타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고개를 다시 돌려 일기를 이어 쓰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보다 격렬한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녀석이 발라당 뒤집혀서는 허공에서 발을 바둥바둥 휘저으며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 이내 지쳤는지 가만히 멈춰 있었다. 유심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설마 죽은 건가?’ 싶어 퍼뜩 연필로 살짝 등을 건드려 원래대로 뒤집어주었다. 그러자 바닥에서 통! 가볍게 튀어 오르더니 뒤뚱뒤뚱 느릿느릿 그러나 녀석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묘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나의 무심한 손가락질이 녀석에게는 생과 사를 결정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작 나에겐 의미 없는 가벼운 손가락질일 뿐인데, 어쩌면 신과 인간의 관계가 나와 벌레의 것과 비슷하려나.

동네 이름은 <별천지 마을>, ‘별’이 많고 하늘(‘천’) 아래 첫 동네이며 연못(‘지池’)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동네에는 연못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개구리울음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연못에 다다르니 얼핏 보아도 수백 마리의 개구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고 몇몇 개구리들은 돌 위에 앉아 개구리 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개구리들은 단숨에 울음을 멈추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마을 구석에 있는 연못에서 마을 어귀로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걸었다. 오늘의 하늘에는 솜털처럼 툭, 툭 뜯어져 정갈하게 펼쳐진 양떼구름이 찾아와주었다. 본래의 하늘은 바다처럼 드넓다는 사실에 잠시 정신이 멍해진다. 마을 어귀에는 굵직하고 반듯하게 자란 소나무들이 모여있고 그 사이에 정자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있었다. 따뜻한 드립 커피를 홀짝이면서 솔향기 가득 머금은 푸른 바람을 맞으며 숨을 쉬었다. 마치 소나무들이 내쉬는 숨을 받아 마시고 있는 것 같다. 숲과 산에 있을 때면 가끔 나무의 숨이라 느껴지는 특별한 공기가 느껴진다. 그 숨을 받아 마시며 평평한 돌 위에 눕거나 나무에 기대 잠깐 잠에 들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맑아진다. 나무의 숨을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퍽 뜨거워진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하고 오니 몸 곳곳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시원한 물로 땀을 씻어내고 한지문을 열어 빛과 바람을 들이고 푹신한 이불을 깔고 털썩 누웠다. 하얀 이불로 몸을 돌돌 만 채 시선이 닿은 곳은 연푸른 봄 하늘에 펼쳐진 단정한 양떼구름. 문득 5년 전, 동해의 첫 집이 생각났다. 침대에 누우면 창밖으로 감나무와 새, 그리고 하늘만 보였지. 참으로 편안하고 달콤하여 유독 낮잠 자는 걸 좋아했더랬다. 우리 둘 모두 좋아하는 노르웨이 음악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의 서정 소품집(Lyric Pieces)을 잔잔하게 틀어놓고는 바람에 실려오는 새소리를 자장가 삼아 푸른 하늘 아래 낮잠을 잤다.

점심을 먹고 어제와 같이 카페로 향했다. 오늘은 바 테이블 자리가 아닌 구석자리에 앉아 전기현 선생님의 목소리와 향기로운 음악을 들으며 오에 겐자부로 작가님의 책을 읽었다. 문장을 읽을 뿐인데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영혼을 만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어떤 공간에서의 독서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움직인다. 책마다 주파수가 맞는 공간이 있는 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노르웨이 외딴섬에 있는 오두막에서 자발적으로 고립된 시간을 보낼 때 읽은 책 ‘고요’(silence)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온전히 살아있었듯, 공간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향기로운 책은 많은데 향기로운 공간은 애써 찾지 않으면 쉽게 만날 수 없다. 향기로운 고독의 가치가 비근한* 세상은 아니니 말이다.

음력 2월 15일,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보름달을 기다렸다. 바다에서 떠올라 산 위로 올라올 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달을 기다리며 서쪽 하늘 멀리 사라져가는 붉은 태양의 흔적과 동쪽 하늘에 드리운 어둠 속 사라지는 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달빛의 흔적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양떼구름 사이로 달의 머리가 떠오르고 어느새 산능선을 따라 데구르르 구르는 구슬 모양의 보름달을 마주했다. 달은 멈추지 않고 떠오르더니 하늘 높이 올라갔다. 산바람이 세차게 몸을 흔들어도 나의 시선은 요지부동이었다. 600m 높이의 시골 한가운데서 만난 달은 너무나도 제자리에 있었다. 모두가 밤의 이불 아래 가는 숨을 쉬고 있는 시간, 품을 수 없는 거대한 도화지에 오직 달빛 한 줌 동심원을 그리며 빛나고 있다. 동물원에 갇힌 새를 바라볼 때와 훨훨 하늘을 나는 새를 바라볼 때의 마음이 다르듯, 제자리에 있는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이 세상의 것들을 얼마나 제자리에서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24절기를 만든 선조들은 늘 하늘을 바라보고 바람과 빛을 섬세히 헤아리며 시절에 이름을 붙였다. 지금은 일 년을 12개의 달로 나누고 시간을 시, 분, 초로 나눠 거기에 숫자를 붙여 인식한다. 숫자에는 경험도, 깨달음도, 과거와 현재의 연결도 담겨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사용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지금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빽빽해지고 높아지는 건물들은 하늘을 조각내고,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인공 빛은 밤하늘의 향기로운 어둠을 몰아내고, 탁해지는 뿌연 공기는 숨 쉬는 것을 괴롭게 해 너른 계절을 풍요로이 누리기보다는 비좁은 방안에 가둔다. 감각은 산란하여 점차 무뎌지고 보고 느끼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위기에 처한 지금, 절기가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을까. 지금 여기, 이토록 거대하여 확실하게 압도하는 자연이 있는 곳에서나 절기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스마트폰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부러 멀리한 건 아니고 스마트폰 속 세계가 재미없었다. 넘쳐흐르도록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땐 오감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시간이 부족하다. 하물며 그 작은 네모칸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무언가를 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야기가 일기장에 쏟아져 나왔다. 한순간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그리고 썼다. 그러면서 내 안의 지혜가 기지개를 켜고 자기 일을 하기 시작했다. 끈적한 마음의 짐을 산뜻하게 닦아내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명료하게 나누고 지금 무엇을 하면 좋을지 들려주었다. 나는 그 지혜의 말을 부지런히 옮겨 적었다. 노르웨이 오두막에서 그러했듯 다시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며.

* 비근하다 : 흔히 주위에서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알기 쉽고 실생활에 가깝다.

📌 스테딜리

주택가에 조용히 자리한 강릉의 작은 카페. 좋은 음질의 스피커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앤틱 가구와 편안한 조도의 조명을 통해 작은 방 같은 느낌을 준다. 늘 변함없는 사장님의 친절한 접객과 꼼꼼하고 정성스러운 커피 한 잔이 머무는 시간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  

* 이어지는 글은 단순한 진심 블로그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쓴 사람 | 하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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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나무를 깎는 시간

2박 3일간 평창의 외딴 시골 숙소에서 고요히 쉬어가는 시간을 보냈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카페가 있었는데, 머무르는 내내 하루에 한 번 카페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었다. 책 읽기를 잠시 쉬어갈 때마다 여덟 명 남짓 머무를 수 있는 아담한 내부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무로 만든 작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숫자가 쓰여있는 나무 블록으로 만든 달력, 연필꽂이, 모빌, 도마와 도마 꽂이 등 사장님만의 고유한 미적 감각이 느껴지는 물건들이 눈에 띄었다. 사장님께서는 나무를 깎아 물건을 만드는 법을 배워본 적은 없으시고,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오랜 세월 만들어왔다고 하셨다. 

나무를 깎아 만든 물건의 아름다움을 잔뜩 느꼈던지라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우드 카빙에 대한 마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런 마음을 품은 채로 강릉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관심 있게 지켜보던 목공방에서 우드 카빙 워크숍을 한다는 인스타그램 글이 올라왔다. 하고 싶은 마음과 적절한 기회가 잘 맞아떨어진 순간이었기에 나와 짝꿍은 아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워크숍을 신청했다.

며칠 뒤 목공방이 있는 속초로 향했다. 속초는 강릉과 가까워서 여러 번 가보기는 했지만, 공방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딴 동네에 있었다. 날이 흐리고 해가 질 무렵의 시간이라 거리의 분위기는 다소 어두웠지만, 공방은 두세 개의 주백색 스탠드 불빛 덕분인지 따뜻하고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공간을 반으로 나누어 한 켠은 공방으로, 다른 한 켠은 직접 만드신 가구들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공간 전체에 향긋한 나무 내음이 가득했다. 따뜻한 색감의 스탠드 조명과 낮은 조도, 진득한 나무 내음, 그리고 목수님의 느긋한 접객 덕분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워크숍을 시작할 수 있었다. 

워크숍의 시작은 우드 카빙의 도구인 끌을 익히는 것이다. 끌을 처음 써보았기에 연습용 나무를 깎아보며 도구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목수님께서 도구를 어떻게 쥐고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는 알려주셨지만, 어느 정도의 힘을 줘야 하는지는 온전히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힘을 세게 주면 너무 깊게 파이고, 그렇다고 힘을 약하게 주면 잘 깎이지 않는 탓에 적절한 힘을 주는 게 중요한데, 역시나 적당히가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우리는 끌이 손에 익을 때까지, 원하는 깊이와 너비만큼 일정하게 파낼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연습했다.

일정한 크기로 깎아내기 위해 마음을 모으다 보니 들쭉날쭉했던 모양새들이 제법 일정해졌다. 처음이다 보니 완벽하게 할 수는 없기에 ‘이만하면 충분하다'싶은 선에서 만족했다. 목수님께서도 ‘이제는 실전으로 넘어가도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기지개를 크게 한 번 펴고서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짝꿍은 동그란 모양의 컵 받침대에 초승달을 그려 넣었고, 나는 네모난 모양의 컵 받침대에 벌집 패턴으로 깎아보기로 했다. 일정하게 잘 깎아보고 싶은 마음에 연필과 자로 첫 줄이 시작되는 지점을 일직선으로 그었다. 그러고는 끌을 들어 숨을 크게 내쉬고는 하나씩 천천히 파내기 시작했다. 세로로 길쭉한 육각형 모양의 벌집 구멍 하나를 깎아내기 위해서 두세 번의 끌질을 해야 했는데, 육각형이 하나 만들어질 때마다 손으로 톱밥을 털어내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서는 원하는 깊이와 길이만큼 깎였는지 확인했다. 

한 줄에 열네 개의 육각형이 있었고, 그렇게 총 열두 줄을 깎아내야 했다. 두 줄을 깎아낼 때마다 다소 참아왔던 숨을 푹 내쉬며 긴장되어 있던 팔과 어깨, 그리고 목을 한껏 풀어줬다. 나무를 처음 깎으면서 가장 어렵게 느낀 건 팔에 힘을 빼는 일이었다. 손과 팔은 끌의 위치와 방향을 잡아주고, 몸에 힘을 주어 나무를 깎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팔에만 힘이 들어가서 팔과 어깨가 금세 경직되기 일쑤였다. 처음 연습할 때는 ‘팔에 힘을 빼고 몸에 힘을 줘야지'라고 스스로 되뇌었는데, 어느새 팔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걸 몇 번 경험하고 나서는 ‘처음이니까 힘이 좀 들어가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다음 날 팔과 어깨에 피로가 쌓이는 것도 경험이고, 그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자연스레 팔에 힘을 빼고 나무를 깎는 요령을 터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깎아내는 작업을 모두 마치고는 나무가 물에 닿아도 썩지 않도록 오일을 발라줬다. 오일을 나무에 도포하여 검지로 꼼꼼하게 펴 발랐다. 미끄러운 오일을 거친 나무에 입혀줄 때, 어린아이가 촉감놀이를 하는 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다 완성을 하고 나니 매끈해진 나무의 느낌이 좋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요리조리 각도를 바꿔가며 음영에 따라 달라지는 깊이감을 음미하기도 했다.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볼펜과 카메라에 익숙해진 손이었는데, 끌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써보니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게 된다. ‘일상에서 자주 쓰는 작은 물건들은 직접 만들어서 써도 좋겠구나!’ 어떠한 물건이든 만족스러울 정도로 잘 만드는 건 분명히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걸 느낀 시간이었다.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만드는 일에 더 힘쓰는 분위기가 되면 물건은 기쁨과 만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우드 카빙 워크숍을 마치고 며칠 뒤 애정 하는 책 <핸드메이드 라이프>를 다시 읽었다.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같은 용도의 물건을 살 수 있지만, 두 시간이 넘도록 애쓰며 깎은 물건이라 그런지 컵 받침대를 쓸 때마다 흐뭇한 마음이 피어오르며 괜히 한 번 더 만지작거리게 된다. 오랜만에 직접 만든 물건을 써보니 물건을 소유하게 되는 과정이 쉬워질수록 물건에 대한 애정도 덜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실력이 부족할지라도,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종종 물건을 직접 만들어 쓰며 소소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살자고 다짐하게 된다.

 ☀︎ 퐈이어빈

강릉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지만,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때로는 마실 버스를 타고 찾아간다. 바닐라 라떼가 없는 아쉬움은 홍천산 헤이즐넛 라떼로 잊혀진다.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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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일기 Jiun Kim 유진의 일기 Jiun Kim

여름의 물

요즘 사주명리를 공부하고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주명리: 운명학으로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8주짜리 수업을 결제했다. 원래 관심 있는 분야였는데, ‘자신을 돌보는’, ‘삶을 사랑하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다. 나를 돌보는 다양한 경험을 해왔지만, 사주명리가 나를 돌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2019년쯤 처음 본 사주 상담에서 들었던 말 한마디로 괴로움의 문턱을 넘겼던 걸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지금 많이 괴롭죠? 어려운 터널의 끝이니, 조금만 더 견뎌봐요.”

그 시절의 나는 정말 힘들었다. ‘힘들었다’라는 말로 압축되는 게 억울할 만큼. 눈물 뚝뚝 흘리며 집에 가던 날도 많았고, 이렇게 못난 사람인데 살아서 무얼 하나, 내가 그동안 이뤄온 성취들도 다 가짜구나, 같은 생각을 했던 때이니, ‘어려운 터널의 끝'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견디게 해줄 만했다. 그 터널의 끝이 보일 때쯤 명상을 만나 많이 회복되었으니 그 선생님의 말씀은 내 삶의 구명줄 중 하나가 된 셈이다.

그전까지 인터넷에서 재미로 사주를 본 적은 있지만, 상담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오행이 다 있으니 특별하게 잘하는 것은 없어도 꽤 괜찮은 사주일 것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상담에서 들은 이야기는 차원이 달랐다. 친절하고 쉽게 풀이해 주셔서 시간이 꽤 흐른 지금까지도 자세히 기억난다. 그중 내 사주가 ‘여름의 물'이라는 발견 또한 의미가 컸다. 

“여름의 물이라서 바쁜 거예요."

“여름의 물이 어때서요?”

“여름의 물.. 여름에 얼마나 더워요.. 그래서 사람들은 물이 필요한 거죠. 바로 유진 님이요.”

여름의 물은 쓰임이 많아 바쁘다고 한다. 그제야 의문이었던 ‘나는 왜 이렇게 항상 바쁠까’가 해소되었다. 바쁘단 말 참 싫어하는데도 ‘바쁘고 힘들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삶이었다. 아무리 속도 12 러닝 머신에서 내려오겠다고 비장하게 말해도, 누군가 나에게 잠깐만 속도 15 러닝 머신에 타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나의 쓸모에 감격해 웃음과 따봉을 날리며 러닝 머신에 탑승한다. 그뿐만 아니라 재밌고 의미 있는 일에 무작정 달려들고, 문제라고 생각되는 일도 잘 지나치지 못한다. 그야말로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의 전형이다.

바쁜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들으니 오히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내 잘못이 아니구나,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거구나. 그렇다면 요즘 다시 떠오른 의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바쁨과 휴식을 균형있게 다룰 수 있는 것인가?’였다. 마침 일곱 번째 수업의 주제가 ‘균형과 조화 찾기’였다.

수업 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인성과 재성이 많은데, 그에 비해 식상이 약하다는 것이다. 능력을 모두 결과로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이어서, 삶에 있어서 균형을 맞추려면 목적 지향적이지 않은 취미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취미도 쓸모(결과)가 있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았다. 10년째 배우고 싶은 도예를 시작하지 못한 이유도 결과로써 내 인생에 어떤 쓸모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나의 취미인 명상, 요가, 사주명리 같은 것은 바쁜 삶에서 정신적 산책을 만들어내어 균형을 맞춰주니 무척 좋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왜 자꾸 취미로 도망가고 싶을까 싶었는데, 사실 살고자 하는 나의 무의식적 도피였다.

몸과 정신도 음양 안에 있다. 몸이 편하면 정신이 괴롭다. 반대로 정신이 편하면 몸이 편치 않다. 모르겠다고? 과거 농업 시대에는 농사를 짓느라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풍요로웠다. 현대인들은 어떤가? 몸은 편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오죽하면 감정 노동이 생겼겠는가. 음양 관계란 이런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다. 낮과 밤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이것이 자연의 원리이며 생명의 원리다. 
⟨46p. 다르게 살고 싶다. 박장금 지음⟩

삶을 긍정하는 감각은 참 소중한데, 나의 힘만으로는 잘 일궈지지 않는다. 이런 일정을 만들지 않으면 자꾸만 내가 잘하는 건 도대체 뭐지? 아니 잘하는 게 있긴 한 건가? 생각의 늪에 빠진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너무 크게 생각해서 괴롭다고 한다. ‘자아를 가볍게 할수록 행복하다'라는 말씀이 수업 전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에고라는 적⟫,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책이 생각나서 오랜만에 다시 펼쳐보려고 한다.

최근에는 일 년에 한 번꼴로 사주를 보았는데 늘 남이 해주는 해석만 듣다가, 왜 이런 해석이 나왔는지 스스로 살펴보니 재밌는 시간이었다. 8주라는 시간 동안 사주명리라는 방법론으로 내가 힘든 이유를 파악하고, 그걸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무엇이든 자신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은 결국 ‘나를 돌보는 시간'이 아닐까. 선생님 말씀대로, 무엇이 되고자 하지 말고 현재에 머무르며 주어진 일과를 해내려고 한다. 그리고 도망간다고 자책하지 말고 조금 더 편안하게 취미 생활을 즐겨야겠다.

📌 카페 공유

보문동에 있는 작은 카페. 왜색이 짙어진 가게들이 많아지면서 어쩐지 그런 가게는 피하게 되었는데, 카페 공유는 조금 다르다. 그저 겉햝기식 왜색이 아니라, 진짜 일본에서 얻었던 무엇인가가 너무 좋아서 이런 스타일의 카페를 하는구나 싶다. 분위기도 커피 맛도 좋다.

쓴 사람 |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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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의 일기 Jiun Kim 선재의 일기 Jiun Kim

되는 것만 있으면 무슨 재미

오늘은 수련에 무척 몰입했다. 사바사나를 기다리지 않으면서 매 순간의 아사나에만 집중하는 것은 내게 매우 드문 일인데, 어느새 수련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며 문득 사바사나 차례가 된 것을 깨닫고는 신기했다.

빈야사의 시작은 마치 아침 같다. 이불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하는 우리들의 아침. 그러나 시작되고 나면 자연스레 흘러가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빈야사는 하루
수련은 삶, 사바사나는 죽음

오늘 수련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던 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내 추측은 호흡이다. 지난주 어느 순간엔가 코 호흡법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늘 코 호흡이 얕고 부자연스러워 입으로 내쉬었는데, 지난주 수련 중 주변의 깊은 코호흡을 소리로 듣고 흉내 내다 보니 나의 코호흡이 거짓말처럼 깊어지는 어느 구간을 찾았다. 호흡이 깊고 길어지니 조금 더 근육으로 숨을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고. 오늘 수련에서는 역대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다운독을 했다. 그래 봤자 나만 알아차릴 수 있는 미묘한 차이였을 텐데, 선생님이 그 순간 가만히 내 등허리를 두드려주고 지나갔다.

수련을 마칠 무렵, 불을 끄자 수련실이 어둑해졌다. 사바사나를 위해 매트에 누워 머리를 바닥에 대자, 편안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아, 끝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두 손을 가만히 배 위에 올려놓고 있자 선생님이 내 몸 위로 큰 사각 담요를 덮어주셨는데, 매주 하는 경험이었음에도 그날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내 몸 위로, 누군가 따뜻한 천을 덮어준 기분이랄까. 무슨 감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감정이 분명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왜였을까?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그처럼 감각과 마음이 살아나는 경험 때문에 요가를 떠나지 못하나 보다.

더불어 오늘 수련을 통해 느낀 건,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어야 재밌다는 것이다. 인생도 그렇고 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공부도 그렇다. 되는 것만 있으면 시시하고, 안 되는 것만 잔뜩이어도 재미가 없다. 보통 나의 수련은 안 되는 것만 잔뜩인 경우가 많은데, 오늘은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서 도전할 맛이 났다. 그 도전 끝에 가만히 누워 휴식하는 것이 눈물 나게 달콤하고 편안했다. 오늘 수련은 잘 살고 잘 떠나는 법에 대한 배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가배도

스타벅스와 메가커피로 점령당한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그래도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간격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곳. 하나은행과 라운지 공간을 쉐어하고 있어, 혼자 커피를 마시며 은행 업무를 보러 온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인간 군상에 대한 묘사가 필요한 작가라면 방문을 추천한다(?)

쓴 사람 | 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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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언의 일기 Jiun Kim 지언의 일기 Jiun Kim

목표: 니트 입기

 “집에 예쁘고 따뜻한 옷도 있는데 맨날 저지 소재의 맨투맨이나 후드 같은 것만 입네요.”
“그렇군요. 다음 주에 이 주제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상담받고 돌아가는 길, 사게 되는 옷과 실제로 입고 다니는 옷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몇 년 전으로,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다. 옷장에 톡톡한 니트가 많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니트를 입기가 힘들었다. '조금 엄살을 피우는 거 아닐까' 혹은 '모두가 그렇지 않나?'라고 합리화하느라, 니트를 입지 못하는 게 얼마나 실제적인 불편함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대체 니트를 입으면 어떤데, 하는 질문엔 답하기 어렵지 않았다. 몸에 닿는 느낌이 무척 불쾌하고,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20대 초중반까지 자주 입었던 코트는 세탁비닐까지 그대로 박제되어 본가 옷장에 나란히 걸려있었다. 영하 2~30도의 날씨에서도 몇 킬로를 걸어서 통학했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는 어떻게 거기서 살았을까?' 스스로 의아해졌다. 영하 40도가 아니라 영하 4도만 되어도 이가 달달 부딪히는 추위로 느껴져서였다. 한겨울에 치마에 스타킹을 신고 나온 친구를 보면, 그 친구가 얼마나 추울지를 상상하고 오지랖 넓게 걱정하느라 정신이 빼앗겼다.
“아니, 이 날씨에 어떻게 그렇게 얇은 옷을 입고 다닐 수 있죠?”
“그 사람이 지언씨와 비슷하게 춥게 느낄 것 같나요?”
“네. 너무 춥잖아요. 날이.”
“그렇게 느끼지 않을 거예요. 고통스럽다면 그렇게 입을 수 없겠죠. 안 그런가요?”
“그런가요? 그 사람이 제가 느끼는 이 추위를 견디면서 입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말 그랬다. 애초에 이렇게 춥지도, 그 짧은 치마에 얇은 스타킹이 최소한 나만큼은 불편하지 않으니까 입겠다고 생각이라도 해볼 수 있을 터였다. 이제껏 내가 예쁜 옷을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쁜 옷을 입을 수 없었던 거였다니. 심리 작업의 목표는 새삼스럽게도 ‘편안하게 예쁜 옷 입기'가 되었다.
*
가끔 본가에 들러 반가운 마음으로 마주한 엄마는 내가 입는 옷에 대한 코멘트로 첫인사를 대신하곤 했다.
“아이고, 왜 옷을 또 거지 같이 입었어!”
“엥? 하하. 뭐 그런 말을 해!”
가끔 엄마가 던진 말에 화보다도 실소가 먼저 터져 나왔다. 김'직언'이라는 별명의 소유자로서, 이 직언 DNA는 모전여전이었구나 했다. 이때 ‘거지 같이’는 ‘거지같다'할 때의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거지' 같다는 의미임을 감안하더라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 자신이 입던 옷을 입기를 종용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서(주로 홈쇼핑이나 신평화시장에서) 산 옷이라며 이번에 집에 오면 가져가라고 했다. 나는 굳이 더 듣지 않아도 엄마가 무슨 옷을 건넬지 알았다. 니트였다. 엄마는 톡톡한 니트를 좋아했으니까. 엄마 본인이 니트 컬렉터다 보니, 어릴 때부터 그렇게도 니트를 입혔다. 회색 니트, 노란색 니트, 꽃 모양 단추가 달린 니트 카디건, 앙고라 털로 짜인 가려운 니트, 까슬까슬한 울 니트, 니트라면 무엇이든 옳았다. 돌이켜보면 엄마에게 니트는 걱정 섞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어디서도 춥지 않길 바라는 마음 말이다.

그런 엄마의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기억하는 한 난 늘 니트가 싫었다. 엄마와 달리 어린 시절 나는 늘 통통했고, 몸에 열이 많아 두꺼운 니트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니트를 입으면 자꾸만 근질거렸다. 니트는 저지 같은 소재의 옷보다 몸매가 드러났고, 니트를 입은 내 몸이 별로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통통한 몸에 껴입은 니트 사이로 땀이 맺힐 때, 니트 입은 나를 거울로 볼 때 몸에 대한 수치심이 뿌리를 내렸다. 니트를 입을 때면 온몸을 벅벅 긁고 있는, 통통한 아이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내게 주는 사랑을 받는 것도, 내가 나를 사랑하기도 어려웠던 그때로.

*
근 몇 년 동안 나는 예쁘고 싶지 않았다. 날 꾸며주고 싶은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 거기까지 힘을 뻗칠 에너지가 없었나, 거기에 쓸 돈이 없었나, 내가 나를 예뻐해 주기 어려웠나, 하면 셋 다였다. 우연히 오프라인 매장에서 가끔 옷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사면서도 내심 불필요한 소비로 느껴지곤 했다. 매장에 들어갔는데 아무 것도 안 사고 나오기가 애매한 분위기여서 사기도 하고, 시기심과 죄책감으로 옷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면 얼마 전 나를 위해 흔쾌히 옷을 산 것은 괄목할 만한 변화다. 마음에 딱 드는 옷을 나에게 사주고 싶어서 옷을 샀다. 대단한 옷은 아니었다. 근사한 자리에 입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옷, 잘 보이기 위해 입을만한 옷이 아니라, 매일 부담 없이 동네 산책할 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가볍고, 피부에 닿는 촉감이 아기 옷처럼 좋고, 알록달록한 옷을 좋아한다는 것을, 또 그런 옷을 고르는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입었을 때 나보다 더 나아져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들지 않는 옷이 좋고, 편하기만 하고 나 자신이 추레하게 느껴지지 않는 옷이 좋다.

산책 메이트 자네와 뒷산에 오르기 위해 빨간 바지에 노란 후드티를 입었다. 패션 아이템 중 신발을 가장 좋아하지만, 심각한 평발임을 알기에 예쁜 신발은 조금 포기하기로 했다. 내 골반과 척추의 바른 정렬은 너무 소중하니까 말이다. 늘 신는 튼튼한 운동화에 딱 나만큼의 부피로 감싸지는 옷을 입고 나서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적당히 타협한 옷차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뒷산 개나리가 만개한 곳에서 곱게 사진도 남겼다.

이제 따뜻한 봄날에도 편안하게 니트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우면서도 여전히 새삼스럽다. 원래의 목표가 편안하게 예쁜 옷(특히 니트) 입기였다면, 이제 목표를 조금 수정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예쁘게 편안한 옷 입기로. 그 편이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거니까.

쓴 사람 | 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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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의 일기 Jiun Kim 현우의 일기 Jiun Kim

목욕탕의 날

두 달 동안 3개의 지원 사업에 도전했다. 그간 기획, 디자인, 촬영, 제작 모두 아내와 나 둘이서 해왔는데, 각 분야별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분들과 협업해서 브랜드를 새롭게 리뉴얼 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지원 사업은 처음이라 ‘한글과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도 익숙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업 계획서 쓰는 방법을 전혀 몰라서 이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다. 제일 중요한 일이자 가장 어려운 일은 심사위원에게 우리의 일이 지원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하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은 심사위원에게는 지원금을 받아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어떤 가치가 있는 일인지, 사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논리적이면서도 쉽게, 적절한 근거를 갖추어 전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수정에 수정을 더하며 마감기한 내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날들이 쌓여갔다.

드디어 지원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그토록 기다려온 마감 없는 기쁨을 즐기기로 했다. 우선 아침에 여는 조용한 카페로 향했다.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느긋하게 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기다려온 시간이었다. 지원 사업을 하면서도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 시간 정도는 있었지만, 마감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 책을 읽고 있어도 내용이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온전히 쉬는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차라리 그 시간에 낮잠을 자며 몸을 쉬어주는 게 나았다. 한편 마감이 없는 가뿐한 상태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 바로 카페에서의 책을 읽는 시간이다. 세 면이 모두 통창으로 되어 있는 이 카페는 환한 빛이 가득 들어오고, 층고가 높아 답답함이 없고, 우리가 좋아하는 북유럽 브랜드의 가구들로 단정하게 채워져있어 우리가 유독 좋아하는 곳이다. 볕이 풍부한 날, 여유롭게 책을 읽으며 ‘쉬고 있다'는 달콤한 느낌을 한껏 만끽했다. 

그리고는 목욕탕으로 향했다. 사실 오늘은 목욕탕의 날이다. 추운 겨울 내내 목욕탕이 그리웠는데, 일 때문에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어느새 '오늘 좀 더운데...' 할 정도로 봄날이 되어버렸다. 목욕탕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추운 날씨에 가야 뜨거운 물에 몸을 푹 익히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동안 일기장에 종종 ‘뜨거운 탕에서 피로를 풀고 싶다'는 말을 몇 번 적었으니, 길게 고민하지 않고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각자 1시간 반 동안 시간을 보내고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평일 점심 시간이 막 지난 때라 목욕탕에는 다섯 사람 정도만 있을 뿐, 널널하게 비어있었다.

샤워를 하고 탕에 첫 발을 담그는 순간, 다리에 찌릿함이 느껴졌다. 뜨거운 온도에 적응하기 위해 처음에는 종아리 까지만 담갔다가, 괜찮아지면 앉은 채로 다리를 담그고, 마지막으로 약간의 용기를 내어 얼굴만 쏙 뺀 채 온 몸을 담갔다. 그렇게 머리를 벽에 기대고 반쯤 누운 듯 판다처럼 퍼져있으니 몸은 완전히 이완되고, 피로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다음은 냉탕이다. 냉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너무 차가울 것 같은데…’하는 생각에 들어가는 게 조금 꺼려진다. 하지만 작년 여름 핀란드의 습식 사우나에서 뜨겁게 몸을 지지고, 열기를 몸에 가득 품은 채 차가운 호수로 들어갈 때의 짜릿함이 떠올랐다. 찬물에 대한 두려움과 쾌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한 번에 몸을 풍덩 담그기 보다는 안전 손잡이를 잡고 발부터 천천히 차가움을 느끼며 서너 개의 계단을 내려갔다. ‘으…’ 소리를 내며 양 손을 겨드랑이에 파묻었다. 냉탕의 온도에 점차 익숙해질 즈음, 과감하게 잠수를 해서 머리 끝까지 몸을 적셨다. 온탕에서는 피부가 늘어지며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라면, 냉탕에서는 피부가 쫀쫀해지며 생기로움이 돋아나는 느낌이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칫솔 하나와 때밀이 수건 하나가 소유물의 전부다. 스마트 폰을 들고 갈 수도 없고, 메모지나 펜을 들고 갈 수도 없다. 물에 몸을 담그는 일과 때를 미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정신적으로도 푹, 쉬는 느낌이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뜨거움과 차가움에 적응하다 보면 어떠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물의 온도에 적응하며 뜨거움과 차가움을 온전히 느끼고, 목욕 의자에 앉아 지우개 똥 마냥 계속해서 나오는 묵은 때를 힘껏 벗겨낼 뿐이다. 깨끗하게 때를 밀고, 다시금 온탕과 냉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피로를 풀기에 목욕탕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목욕재계의 시간을 마치고 아내를 만났다. 우리 둘 모두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눈은 반쯤 풀어졌다. 목욕탕 건물을 나서니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이제는 바람에 날카로운 찬기는 온데간데 없고 따뜻한 부드러움만 깃들어있었다. 어디선가 꽃내음도 느껴져서 ‘이제는 정말 봄이구나…’ 싶었다. 몸은 한껏 이완되었고, 따뜻한 봄바람에 꽃내음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툭 풀어졌다. 당장이라도 풀밭에 누워 낮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은 나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 기분 좋은 나른함에 취해 편의점에서 비타500 큰 병을 사서는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좋은 기분을 이어갔다. 

‘휴식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일하는 법도 모른다.’

오전에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만난 문장이다. 내가 경험한 좋은 쉼 중 하나는 지금의 계절을 느끼며 유유자적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바쁜 속세에 메이는 것 없이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하루. 볕이 잘 드는 카페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고, 뜨거운 물 속에서 몸을 풀어주고, 따뜻한 봄바람을 맞으며 계절이 바뀌어가고 있는 걸 느끼고, 집에 돌아와서는 포근히 낮잠을 잤던 오늘처럼.

 ☀︎ 사임당커피

창문에 비친 소나무의 그림자를 보며 쉬어갈 수 있는 카페. 작년에 북유럽 여행을 다녀와서인지 북유럽 가구와 조명들로 꾸며진 카페가 더욱이나 마음에 든다. 

쓴 사람 | 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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